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남쪽에 있는 자이승(Zaisan)은 ‘울란바토르의 강남’이라고 할 만큼 부자촌인데, 이곳에는 서울의 남산처럼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자이승 전망대가 있다. 울란바토르의 시민 공원 격인 자이승 전망대는 몽골이 구소련군과 함께 연합군으로 참전, 2차 대전에서 승리하여 1971년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 기념으로 구소련이 몽골에 기증한 탑이 있다. 이곳에서 울란바토르 시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몽골 여행객들에게는 꼭 한번 들르는 필수코스이기도 하다.

산 중턱에 주차장이 있지만 매우 협소해서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승전 기념탑 앞의 쇼핑몰(Zaisan Hill)에서 7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자이승 전망대로 통하는 연결다리를 건너 5분 정도 계단을 올라가는 여행객이 많다. 전망대로 올라가기 전 계단 옆에 2차 대전 때 몽골이 구소련을 위해 지급한 탱크가 한 대 전시되어 있는데, 이 탱크가 1943년 모스크바에서 1945년 독일 베를린까지 이동한 경로를 표시한 것을 탱크 아래 돌 비석에 새겨놓았다.

자이승 전망대는 구소련의 붉은 군대의 상징인 깃발을 들고 있는 27m 높이의 거대한 구소련 군인 동상이 투박하게 서 있는데, 몽골인들의 우월감을 인정해 주어야 할지 구소련의 지배를 받던 피압박민족의 애환을 동정해야 할지는 잘 분간되지 않는다. 몽골이 러시아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러시아의 용병으로 참전한 2차 대전에서 승리했다고 자위하는 몽골인들의 희망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겔레르트 언덕(Gellert Hegy)에 1947년 2차 대전 당시 구소련군이 나치 독일군을 무찌른 전승 기념으로 세운 시타델라 요새 앞의 '자유의 여신상'과 비슷하다. 군인 동상을 지나 전망대에 오르면 둥근 원형 대리석 벽 안팎에 1921년 몽골 독립 선언에 대한 구소련의 지원, 스탈린과 레닌을 포함한 구소련-몽골 연합군이 일본과 독일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모습, 1939년 구소련과 몽골군이 동몽골의 할인골 전투에서 일본의 관동군을 물리친 장면과 희생된 무명용사들을 새긴 울란바토르의 랜드마크다. 특히 말과 같이 새겨진 인물 조각상은 담딘 수흐바타르 등과 함께 몽골 독립을 쟁취하고, 이후 공산화를 주도하면서 근대화를 이룬 지도자라는 평가와 티베트 불교 말살 정책과 대량 숙청, 학살을 주도한 독재자라는 '몽골의 스탈린'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허를러깅 처이발상(Khorloogiin Choibalsan:1895~ 1952) 상이 있다. 그는 13세 때 티베트 불교 수도승으로 출가하여 '처이발상’이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처이발상이라는 법명은 몽골어가 아닌 티베트어로서 '처이'는 다르마를, '발상'은 '광대함'을 뜻한다.

자이승 전망대에서는 울란바토르 시내를 조망해 본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고, 오히려 시내 방향 왼쪽 평지에 있는 한국인 이태준(李泰俊:1883~1921) 기념공원이 한국인 여행객의 필수코스라고 할 정도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몽골인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 '몽골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은 몽골 정부에서 대지 300평을 제공하고, 한국 정부와 연세의료원의 재정지원으로 2001년 7월에 준공되었다.

이태준 기념공원 입구에는 한글로 이태준 기념공원이라고 새긴 돌비석이 있고, 공원 정면에 이태준의 가묘(假墓)와 한글 묘비명이 있다.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에도 튀르키예가 6.25 당시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준 데 대한 보답으로 세운 '한국 공원'의 석가탑 모양의 투박하고 어색한 기념탑과 을씨년스런 공원을 생각하면 좋은 비교가 된다. 공원 오른쪽에는 이후 2010년 6월 개관한 이태준 기념관이 있는데, 자료화면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이태준은 1908년 상경하여 세브란스병원 앞에 있던 김형제상회에 점원으로 취직했는데, 김형제상회는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던 제중원 출신인 의학도 김필순이 운영하던 가게였다. 이곳은 안창호 등 독립지사들의 비밀 회합 장소였는데, 이태준은 이들의 도움으로 1907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11년 6월, 한국인 최초의 의사 7명 중 1명이 되었다. 그는 세브란스의대 재학 중에 도산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했는데,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즉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에서 의사로 병원에 취직했으나, 1914년 31세 때 처사촌인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의 고륜(庫倫)으로 활동지를 옮겼다. 김규식은 몽골에서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었으나, 국내에서 약속한 비밀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포기하고 고륜에서 가죽제품 장사를 시작했다. 이태준은 고륜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업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당시 몽골인들은 러시아군과 청·일본군의 잇단 지배로 국민의 70~80%가 악성 성병인 매독에 감염된 상태였으나, 몽골인들은 라마교의 영향으로 기도와 7문이나 외우는 미신적인 치료법만 받다가 이태준이 근대적 의술로 매독 퇴치에 성공함으로써 ‘끼울(高麗) 의사 이태준’은 고륜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 인사가 됐다. 그러자 몽골 국왕 복드 칸(Bogd Khan)은 그를 어의(御醫)로 임명했는데, 이태준은 1917년 7월 몽골 국왕으로부터 제1급 국기훈장인 '에르덴이-인 오 치를'을 받았다. 이것은 ‘귀중한 금강석’이라는 훈장이었다.(자세히는 2024. 3. 28. 복드 칸 겨울궁전 참조)

그러나 1920년 2월 소련군이 고륜을 점령하면서 이태준의 병원도 약탈당하자, 이태준은 상해로 탈출하다가 체포되어 고륜으로 압송된 후 총살되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러나 소련군에 총살되어 암장된 이태준의 묘소를 찾지 못해서 공원에 가묘(假墓)를 설치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