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은 전세계의 핵심 산업이다. 식량안보와 연결할 수 있는 동시에 지역에 인구를 유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이 청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전세계는 물론 전국 자치단체는 청년 귀농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도 단위 자치단체는 상대적으로 인구소멸이 더욱 우려되는 상황이라 사활을 걸고 있으며 대전시 역시 이들을 유입하기 위한 여러 장려책을 내놓고 있다. 그렇지만 MZ로 대표되며 워라밸을 중시하는 청년 입장에서 농업의 메리트는 그리 크지 않다. 그래도 현재의 청년농은 오로지 사명감 하나에 피땀을 흘린다. 사명감이라 해서 큰 책임을 지고 거대한 희생을 해야 하는,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그저 내가 나고 자란 곳이기에, 그리고 나고 자란 이곳에 다양함이 있길 원하는 마음뿐이다. 정광조(35) 더피다 대표의 이야기다. 포용으로 성장한 고향인 대전이 농업인도 포용하는 ‘살기 좋은 도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음악인에 대한 꿈
천둥벌거숭이가 그렇듯 누가 처음부터 진로를 찾을까. 정 대표 역시 초등학교 때엔 친구와 그저 여름엔 방역차 연기를 마시고 겨울엔 놀이터에서 눈싸움하고 자랐다. 모두가 사춘기에 빠져들 중학생 시절엔 친구와 음악에 미쳤다고. 그래서 남학생이라면 모두가 꿈꿨던 밴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음 맞는 몇 친구와 팀까지 결성하며 평일엔 학업에, 주말엔 밴드 연습에 매진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각자가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무대에 서지도 못 하고 주야장천 연습만 하다 밴드는 사라졌다. 친구들 역시 대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이유로 하나둘 드럼 스틱과 기타 초크를 내려놨다. 그러나 정 대표는 마음 한켠에 음악에 대한 자리를 남겨놨다. 평범하게 대학 진학을 원하는 아버지와 늘 대립했고 보다 못한 어머니가 정 대표의 음악 생활을 응원하며 음악을 통해 대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란 나이에 정식으로 악기를 잡고 배우기엔 너무 늦었죠. 그래서 선택한 건 음악을 학문으로 다가가는 작곡이었어요. 다행히 한 번에 중앙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만큼 음악에 진심이었어요.”

서른즈음에
재수 없이 한 번에 입학했으나 그는 하나의 상수를 간과했다. 뭇 남성이라면 해결해야 하는 병역 문제다. 음악 분야에선 늦깎이로 시작한 그였기에 기왕이면 군악대를 희망했지만 군악대는 일반병보다 정원이 많지 않았기에 정 대표는 번번이 낙방했다. 그는 남들처럼 21살, 늦어도 22살 입대할 줄 알고 휴학에 휴학을 반복했는데 26살이 돼서야 이등병을 달 수 있었다. 복학해 29살 학사모를 쓰고 취업전선에 나가다 보니 30살 직전의 신입을 받을 회사는 찾기 어려웠다. 특히 작곡과는 대개 광고음악이나 영화음악을 만드는 스튜디오로 향하는 게 대부분이고 인맥도 중요했기에 남들보다 오랜 기간 학교를 쉬었던 그에게 선택지는 없다시피 했다. 그를 열성적으로 응원했던 부모의 눈치도 보였기에 정 대표는 한동안 방황 아닌 방황을 해야 했다. 그러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부모의 일을 이을 생각 없냐고.

“당시 어머니가 대전 유성구에서 하우스를 짓고 다육식물을 키우며 사업을 하셨고 아버지는 은퇴 이후 이를 도왔어요. 해외 판로도 생기는 등 사업이 번창하니 이를 이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고 기왕이면 가족이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거죠. 장고에 장고를 두고 2016년 12월 31일 가업을 잇겠다고 했어요.”
후계농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청년, 농업 관심 가져주길”
음악이란 한 우물만 파던 정 대표에게 아무리 가족의 일이었어도 농업은 굉장히 힘들었다. 특히 창업농인 부모님으로부터 후계농 수업을 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 대립이 있었다. 농업이란 이른바 자기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야 하는데 정 대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흔히 발생하는 세대차이다. 실제 이 같은 창업농과 후계농은 서로가 가족인 경우가 많아 의견충돌은 꽤 잦다고. 여기에 당시 유성구에 임대하던 농지 계약 연장에 실패하며 새로운 땅을 알아보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대전은 워낙 땅값이 비싸 3.3㎡당 20만 원 정도인 충북 음성으로 가족이 아예 이전하는 걸 고려했지만 정 대표는 강력하게 대전에 남길 원했다. 자신이 직접 발품을 팔며 음성보단 비싸지만 합리적인 가격의 농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정 대표의 진심을 느낀 부모는 이제 그를 믿고 모든 걸 맡기기 시작했다.

“창업농과 후계농 사이 갈등이 꽤 심하죠. 새로운 땅을 알아볼 때 굉장히 고생했고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래도 우리는 일련의 과정을 함께 겪으며 잘 풀었어요. 하지만 비싼 땅값에 대전을 떠나는 청년농이 많을 거예요. 농업은 정말 중요한 산업이고 청년 역시 그렇죠. 모든 산업이 그렇지만 농업은 정말 중요하잖아요. 청년도 그렇고요. 모두가 관심을 둔다면 좋을 것 같아요.”

그의 친구들은 이른바 9 to 6에 주말엔 쉰다. 그러나 그에게 근무 시간과 휴일이란 개념은 없다. 농작물은 그의 아버지 말대로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 대표는 자신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무너지는 순간 반대를 무릎쓰고 대전에 남겠다고 한 각오마저 후회로 남을까 봐. 그는 단언컨대 대전을 대표하는 청년농이자 후계농이다.

글·사진=김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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