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수많은 충신·석학 배출한 명문
여산 송씨는 역사상 많은 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했다.
특히 민족이 국란(國亂)을 당할 때는 충절(忠節)과 기개(氣槪)로서 민족수호에 사력을 다한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선조를 무수히 배출한 대성(大姓)이다.
선계(先系)는 송주은(宋柱殷)의 후손인 자영(自英)이 슬하에 3형제를 뒀는데 첫째가 여산(礪山) 송씨의 시조인 유익(惟翊)이요, 둘째가 은진(恩津) 송씨의 시조인 천익(天翊이며, 셋째인 문익(文翊)이 서산(瑞山) 송씨의 시조로서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연원을 이룬 것이다.
여산 송씨의 시조인 유익(惟翊)은 고려 때 진사(進士)로 나라에 공을 세워 여산군(礪山君)에 봉(封)해져 은천광록대부추밀원부사에 추증된 공신(功臣)이며, 고려후기 원종(元宗)때 4세손 송송례(시호:貞烈公)가 왕정복고(王政復古)에 기여한 공으로 추성익대보리동덕좌명공신이란 호를 받고 여량(礪良:여산의 옛지명)부원군에 봉해진 걸 계기로 본관이 여산으로 정해졌다.
시조 유익공(惟翊公)의 묘소는 전북 익산시 여산면 문수동에 위치해 매년 동지일(冬至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원래 동지사(冬至祀)란 황실(皇室) 또는 왕실(王室)에서만 지내는 궁중의 제사(祭祀)로 일반 사대부, 평민은 지낼수 없는 예제(禮祭)이나 정렬공의 충정에 원종(元宗)이 감탄해 정렬공의 시조묘는 동지사를 모시게 조정에서 교지를 하사(下賜)했고, 더욱이 평민이나 사대부의 묘는 능(陵)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 우리 조상의 예법이나 오직 정렬공의 묘만이 공의 빛나는 위업을 기려 고려 충렬왕의 교지로서 홍능(洪陵)이라는 능칭(陵稱)을 하사(下賜) 받음은 송문(宋門)의 자랑이다.
여산 송씨의 세계(世系)는 6세손에 이르러 원윤공파, 밀직공파, 소윤공파, 지신공파, 정가공파 등으로 나뉘어 5파가 세도가문의 기반을 닦았다.
조선조에 중종반정시 정국공신 3등의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내신 송질,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협조해 국가기강 확립에 기여한 좌의정 송인명, 조선의 절신(節臣) 송상현,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전공을 세원 송여종, 송대립, 8대 문장가중 한사람 송익필, 성리학의 대가 송한필, 청백리(淸白吏) 송천희, 초·예서에 능해 청나라 강희제의 찬탄을 받았다는 송일중, 조선의 항일운동가로서 친일파 대신의 제거와 산림개발권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항해 보안회를 조직, 극력 반대하여 철회시키는 등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한몸 불사르신 송수만,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충신과 석학들을 배출한 송문(宋門)은 우리나라의 유수한 명문(名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