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오니아해 건너편 ‘해가 뜨는 동쪽’을 아나톨리아(Anatolia)라고 했는데, 아나톨리아가 오늘날의 튀르키예다. 그리스는 BC 750년경에야 아테네, 스파르타 등 도시국가들이 크레타와 미케네의 선진 문명을 흡수하여 그리스 고전시대가 열렸지만,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이보다 훨씬 빠른 BC 8000년경부터 수많은 나라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특히 동서양을 왕래하는 대상(隊商)과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어서 일찍부터 상업도시 역할을 했던 앙카라(Ankara)는 1차 대전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던 케말 파샤가 혁명의 중심지로 삼았다. ‘앙카라’란 ‘닻’을 뜻하는 그리스어 안시라(Ancyra)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앙카라 도시가 닻 모양의 언덕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23년 10월 연합국과 터키 간의 로잔 조약으로 독립이 승인되고, 11월 케말 파샤(케말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앙카라는 수도가 됐다. 그는 2000년 동안 로마, 비잔틴 제국, 오스만 제국 등 세계 대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에서 1300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잔재와 이슬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앙카라를 공화국의 수도로 삼고, 술탄-칼리프제 폐지, 종교와 정치의 분리, 이슬람 국교 폐지, 일부다처제 폐지, 남녀평등, 여성참정권 등을 추진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달력도 이슬람력에서 태양력으로 바꾸고, 튀르키예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대체했다. 그의 개혁 정책은 이슬람 강경파의 거센 반발도 있었지만,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국교를 폐지했어도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 영향으로 국민의 99%가 모슬렘이다. 터키 공화국은 2022년 1월부터 튀르키예로 국호를 변경했는데, 튀르키예란 '튀르크인의 땅'을 뜻한다.

튀르키예의 인구는 약 8600만 명인데, 앙카라는 550만 명으로 1600만 명의 이스탄불에 이어 제2의 도시다. 또, 수도이자 앙카라주의 주도(州都)인데,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버스는 6시간, 열차는 5시간 30분이 걸린다. 이스탄불과의 앙카라는 일반 열차 이외에 튀르키예판 KTX인 YHT가 운행되고 있는데, 4시간 10분이면 갈 수 있다. 우리 가족은 YHT를 타고 앙카라에 도착했는데, 앙카라 YHT 역사 뒤편에 일반 앙카라역이 있다. YHT의 특실 요금은 3만 2000원, 비즈니스석 2만 7000원, 이코노미석이 1만 8000원이다.

또, 앙카라 에센보아 국제공항은 동쪽 청사가 국내선 여객터미널이고, 서쪽 청사가 국제선 터미널이어서 이스탄불에서 여객기를 타고 앙카라에 도착한다면 동쪽 터미널에서 내린다. 만일, 외국에서 입국한 여행객이라면 서쪽 터미널에서 내린 뒤, 국내선 터미널로 갈아타는 것이 보통이다. 참고로 튀르키예 항공으로 입국하여 국내선으로 갈아타면, 티켓을 할인해 주는 이외에 환승 대기 시간이 20시간 이상일 경우에 비즈니스석 승객은 호텔 숙박료 3박, 이코노미석 승객은 숙박료 2박 비용을 부담해 준다고 한다.

앙카라의 첫인상은 이스탄불처럼 고색 찬란하고 아기자기한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튀르키예의 수도로서 정치. 행정의 중심인 것을 강조하는 점이 두드러졌다. 1923년 앙카라가 수도가 된 이래 중심이었던 구시가지 울루스(Ulus)와 신도시 예니세히르(Yenisehir)로 나뉘는데, 울루스에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양식의 옛 건물과 좁은 도로가 특징이다. 예니세히르에는 넓은 도로, 관공서, 외국 공관, 호텔, 극장, 아파트 등 현대식 건물이 많다. 튀르키예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청동 기마상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시의 광장이나 공원에 많이 세웠지만, 앙카라에는 독립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1927년 11월 오스트리아 조각가의 설계로 울루스 광장에 세웠다. 그리고 1960년 신시가지 크즐라이 광장(Kizilay Square)에 튀르키예 독립전쟁 박물관을 짓고, 그 앞에도 아타튀르크의 청동 기마상을 세웠다.

앙카라에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수많은 민족이 살아온 문화유적을 전시하고 있는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튀르키예의 역사· 민속·예술 등의 유물을 전시하는 민속박물관이 있지만, 아타튀르크 영묘 (Anitkabir)는 다른 어떤 기념관보다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아타튀르크 영묘 안에 그의 개인 소지품 중심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아타튀르크 박물관이 있는데, 크즐라이의 독립전쟁 박물관은 그를 비롯한 독립전쟁의 자료를 전시하는 점이 다르다.

1934년 튀르키예 국회는 케말 파샤에게 ‘아타튀르크(Atatürk)’란 경칭을 수여했는데, ‘아타’는 아버지, ‘튀르크’는 터키의 의미로서,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최고의 찬사이다. 그는 1938년 11월 10일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에서 57세로 죽었는데, 튀르키예는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 그가 죽은 시간에 맞춰서 전국에 사이렌이 울리고, 모든 차와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기리는 묵념을 한다. 또, 그의 초상화는 관공서, 학교뿐만 아니라 동네의 조그만 구멍가게에도 걸려있고, 튀르키예 지폐에도 있다.

앙카라 시내의 건축물들은 로마 시대의 목욕탕, 율리아누스 원주(Column of Julian), 로마-아우구스투스 사원(Temple of Roma and Augustus) 등을 비롯하여 비잔틴 제국의 성채와 공동묘지, 그리고 수많은 모스크와 앙카라 성이 있다. 오랜 이슬람 국가답게 앙카라에는 수많은 모스크가 있지만, 1967년부터 1987년까지 20년 동안 건축한 코자테페 모스크로서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대의 모스크라 하고, 2019년에 신축한 시슬리 지역의 아흐메트 함디 악세티 모스크는 현대식 설계로 내부는 최소한의 장식으로 단순하고 자연채광을 최대로 받아들인 모스크로 유명하다. 또,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부근에 있는 앙카라 성은 해발 110m의 언덕 위에 쌓은 성으로서 15m 높이의 성벽 위로 올라가면, 사방으로 앙카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서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앙카라 기차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1973년 서울시와 앙카라시가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조성한 한국 공원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