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본 영화 중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작품은 디 아워스(The Hours)였다.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세 여인의 하루를 그린 이 영화는 대사가 많지 않다. 표정과 움직임, 침묵—그 모든 장면을 감정의 결로 엮어내는 것은 바로 OST였다. 잔잔히 흐르다 서서히 감정을 끌어올리는 선율은 오래도록 귀에 남았고, 반복되는 리듬과 점진적인 고조는 영화가 주는 깊이를 오롯이 전달했다. 오늘 소개할 작곡가,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의 음악은 바로 그런 음악이다.
필립 글래스는 미국 현대음악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지금도 활동을 이어가는 그는 클래식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고정된 형식을 넘어 감정과 흐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왔다. 그가 대표하는 ‘미니멀리즘 음악’은 짧은 리듬과 선율의 반복, 미세한 변화의 누적으로 청자를 몰입하게 만든다. 유럽 클래식보다는 인도 음악, 아프리카 리듬, 전자음악의 영향을 받았고, 반복 속에서 시간과 감정의 깊이를 드러낸다. 청자는 그 안에서 음악보다 ‘자기 내면의 반응’을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1970~90년대에는 교향곡과 오페라를 작곡하며 정통 현대음악의 길을 걸었지만 2000년대 들어 영화, 다큐멘터리, 광고 등 대중 매체와 협업하며 더 넓은 청중과 소통했다.
대표적인 영화음악 중 하나가 앞서말한 바로 디 아워스의 OST다. 메인 테마 ‘The Hours’는 상하행하는 피아노 선율과 현악기의 변주가 반복되며 점차 감정을 끌어올린다. 단순한 화성 진행이 아니라, 감정의 떨림과 내면의 흔들림을 포착한 음악이다. 그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정서적 울림으로 작용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영화 속 세 여성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지만, 모두 자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겉으로는 평온한 일상이지만, 그 안엔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저항이 흐른다. 글래스의 음악은 그 복잡하고 고요한 내면을 조용한 반복과 파형으로 그려낸다.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아도, 오히려 더 절실하게 마음에 닿는다. 그는 정형화된 구조보다 감정의 흐름과 움직임에 집중하며 노트—즉, 각각의 음정을 단순한 작곡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담아내는 표현의 수단으로 바꾸어냈다.
글래스의 음악은 필자가 지향하는 크로스오버 음악과도 닮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크로스오버란 단순히 성악과 팝의 결합이 아니라, 클래식이라는 기반 위에서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감정 중심의 표현을 추구하는 음악이다. 필자 또한 성악을 전공했고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지만, 무대 위에서 청중과 깊이 소통하기 위해선 기술보다 진심이, 형식보다 흐름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잘 부르는’ 것보다, ‘진심을 담아내는’ 소리. 그것이 필립 글래스가 오래전부터 실현해온 길이며, 필자가 바라는 음악의 방향이기도 하다.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을 넘어서 흐름과 분위기, 감정의 결이 오래 남는 그의 음악을 접해보지 않았다면, 영화 디 아워스의 OST를 입문작으로 들어보길 권한다. 조용한 반복과 섬세한 변화 속에서, 당신의 마음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요즘 가장 간절히 듣고 싶은 소리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