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니스트·문학박사

단양 온달관광지는 전시관, 오픈세트장, 동굴, 산성 등에서 온달과 평강 공주라는 두 인물의 삶과 사랑, 그리고 고구려의 역사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공간이다. 이번에는 온달관광지에서 바보에서 장군으로 거듭난 온달의 용맹과 평강 공주의 지혜로운 사랑을 이슈 중심으로 문학 산책하고자 한다.

온달관광지 온달 조형물
온달관광지 온달 조형물

◆ 온달의 생애, 바보에서 장군까지

『삼국사기』 열전5 「온달전」의 기록을 중심으로 온달의 생애를 살피면 대략 다음과 같다.

온달의 출생과 사망 시기는 미상이다. 고구려 평원왕 때 평양 출신의 장군으로 부인은 평원왕의 딸 평강 공주이다. 온달은 어린 시절 몹시 가난하였고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걸식하였으며, 옷이 남루하고 얼굴이 못생겨 ‘바보 온달’이라 불렸다.

후에 온달의 부인이 된 평강 공주는 어릴 적 자주 울자, 아버지 평원왕이 “크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공주는 성년이 되어 결혼 문제를 놓고 그 약속을 문제삼아 고씨와 결혼시키려는 아버지의 재가를 거부했고, 자신의 뜻대로 온달에게 시집가 남편과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고, 자신의 재물과 지혜로 온달을 도와 무예와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온달은 무예와 용맹을 갖춘 장군으로 성장했다.

온달관 전시물 일부
온달관 전시물 일부

온달은 이후 3월 3일 국가적인 대제전에 참여하여 사냥·무예 등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 평원왕에게 발탁되어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북주군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장군으로 출세하였다.

그 후 온달은 남한강 일대의 요충지 회복을 자청해 남진하다가 아단성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온달을 장사 지내고자 하였지만,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음과 삶이 결정되었으니, 이제 돌아가시지요!”라고 하자 드디어 관을 들어 묻을 수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온달전」의 전(傳)은 인물의 일생을 이렇게 시간의 순서에 따라 서술하는 역사기술의 한 양식인 동시에 한문학 양식의 하나이다. 그래서 「온달전」은 역사적 관점과 문학적 관점으로 구분되어 논의가 진행되었다.

전은 본래 역사가에 의하여 채택되어 정사(正史)의 필체로 자리를 굳히고, 차츰 정사뿐만 아니라 문인들에게도 보급되어 정사에 수용되지 못한 덕행이나 서인이나 천민의 본받을 만한 행실을 기교적으로 서술하여 후대에 전하려 하였다.

온달은 역사서에 실려 있는 인물이면서 매력적인 이야기 때문에 역사나 문학적 관점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 흔적을 유적에서 찾아보려는 측면까지 확장됐다. 그리고 지역적 유물이나 전설 속에서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유래담 등의 모습으로 회자하고 있다.

온달관광지 온달세트장
온달관광지 온달세트장

◆ 온달과 평강 공주의 변용과 확산

“왕이 농담으로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라고 한 약속을 공주가 엄격히 지켰다”는 회고적 농담과 약속 설정은 설화적 장치로, 공주의 ‘의지’와 왕과 공주와의 대립을 위한 서사적 갈등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공주가 스스로 궁을 나와 온달의 집에 찾아가 시집가는 장면이 『삼국사기』는 비교적 간결하나, 민간 설화에서는 비중 있게 크게 강조한다. 공주가 자기 패물을 팔아 가난한 집을 일으키고 바보 남편을 장군으로 내조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그리며, 충성·효·희생·여성의 주체성 등과 같은 문학적·교육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온달이 ‘바보’에서 공주의 가르침으로 무예·학문을 익혀 전설적 재능을 발휘하며 순식간의 천재적 변모를 보이면서 극적이고 순식간에 전설적으로 뛰어난 장군의 모습을 보인다.

'시신이 움직이지 않다가 공주가 와서 통곡하자 움직였다'는 기록 역시 역사서인 『삼국사기』는 보수적으로 기록했지만, 민담·전기류에서 감동적 마무리를 위해 초자연적·극적 묘사로 전승하고 있다.

온달의 낮은 신분 출발(혹은 일시적 몰락), 평강 공주와의 결혼, 군인으로서의 등용과 전사는 공인된 역사서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는 이후 민담·동화·연극·드라마 등을 통해 크게 극화·미화되고 있다. 설화 「내 복에 산다」, 드라마 「달이 뜨는 강」, 「천하무적 이평강」, 뮤지컬 「겨울 공주 평강 이야기」, 문학 그림책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 동화집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연극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달강달강」, 영화 「여고생 시집가기」, 만화 웹툰 「영웅의 탄생」 등이 그것이다.

공주의 주체성, 온달의 ‘바보→충신’ 극적 변모, 기적적·감동적 장면들은 후대가 덧붙인 설화적, 전설적 요소로 다양하게 변용, 확산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로는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지만, 실제보다 더 진한 ‘서사적 진실’을 전하며 전승되고 있다.

◆ 온달의 전사지는? 아차산성 VS 온달산성

온달을 사이에 두고 온달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에서 이긴 장군의 이야기도 아닌데, 온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阿旦城)의 위치는 서울시 광진구의 아차산성(峨嵯山城)과 충청북도 단양군의 온달산성(溫達山城) 두 곳이 비정되고 있다.

먼저 아차산성에 대한 설이다.

『삼국사기』에 ‘阿旦城’의 ‘旦’자가 ‘且’자로도 표기되어 ‘阿且城’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阿旦城’이 위치한 산은 ‘阿且山’이며, ‘阿且山’이 ‘峨嵯山’으로 표기가 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강 유역·서울 인근이라는 전략적 위치가 ‘한강 이북에서 신라·고구려가 대치했다’는 맥락과 통한다. 또 고구려계 유물로 여겨지는 연화문와당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다만, 「온달전」의 문헌에서 언급된 아단성(阿旦城)으로 특정 짓기 위한 온달이 명시된 문구나 결정적인 유물, 온달의 전사나 전투의 상황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다.

온달산성
온달산성

다음은 온달산성에 대한 설이다.

고구려 때 영춘의 지명이 을아단이었므로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은 곧 지금의 영춘이라고 본다. 을아단의 을은 을지문덕의 을처럼 위를 뜻하는 말이므로 을아단이란 한강 상류의 아단이라는 뜻이고, 거기서 을이 빠졌다는 것이다. 또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출정했는데, 계립령이 지금의 충주시 일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온달산성, 온달동굴과 같이 온달과 관련된 지역 전승과 지형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온달산성은 신라에 의해 축성된 산성으로, 원래 고구려의 축성인지 신라가 재활용한 것인지 논쟁이 있다. 또 『삼국사기』 등 고문헌에서 온달이 단양 지역의 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직접적 언급이 없어, 문헌과 지명 전승 간 괴리가 존재한다.

이러함에도 온달과 평강의 이야기에 지역마다 관심이 많은 것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그들이 주는 매력과 민초들의 꿈과 희망의 대변이었던 온달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변치 않는 인간의 의리라는 보편적인 가치 때문이 아닐까 한다.

◆ 온달 전설의 문학적 가치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 주변은 온달과 연계되어 전해지는 전설과 설화도 풍성하다.

그중 하나가 온달산성의 유래이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바보 온달이 신라군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아 온달산성이라 불리게 됐고, 성 밑에 있는 동굴은 온달장군이 쉬던 곳이어서 온달동굴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특히 온달과 평강 공주가 함께 기거하던 석회암동굴인 온달동굴에는 지금도 물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데, 온달이 동굴에 들어온 4~5월에는 일체 물이 나지 않아 현대 과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 한다.

온달동굴 내부 모습
온달동굴 내부 모습

또 온달이 그의 누이동생과 하루아침에 성을 쌓다가 돌을 나르던 여동생이 바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고 해서 쉬는 바위가 됐고, 온달이 사람을 보내 증원군을 요청한 뒤 부자들과 반석 위에 윷판을 그려놓고 윷을 놀며 작전을 구상해 이 마을이 휴석동이 됐으며, 그 바위는 윷판바위가 됐다고 한다. 그리고 온달장군이 폐주했다는 소식에 온달의 누이동생이 놀라서 선 채로 숨이 막혀 죽으면서 돌로 변했다는 입석바위, 온달장군이 가장 많이 순행했다는 장군목 등의 유래도 있다.

단양의 온달 전설은 그 유래지와 증거물을 중심으로 그 지역민들에게 천년이 넘게 이야기가 확대 재생산되면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곳 전설은 과거와 현재, 역사와 문학이 공존하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바보 온달의 순박한 용기와 평강 공주의 변함없는 사랑은 전설들과 함께 구비전승되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신분을 넘어선 사랑,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의리’이다. 그들의 이러한 사랑과 진정성은 인간 보편적 가치로 우리 마음속에서 희망과 사랑의 화신으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렇게 온달관광지는 전설 속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의 삶에 투영해 볼 수 있는 특별한 사색의 공간이다.

방경태 문화칼럼니스트·문학박사
방경태 문화칼럼니스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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