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산, 부임지마다 선정 베풀어

송복산 묘역

재궁동(齋宮洞)은 송복산의 둘째아들 송찬(宋瓚)이 1456년(세조2) 단종이 폐위되고 사사되자,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초려(草廬, 오두막집)를 짓고 문과 창을 북쪽으로 향하여 단종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내어 당시사람들이 과천처사(果川處士)라 불렀다.

그는 생육신 이맹전과 친하여 경상도 선산의 금오산에 은거하자 여산송씨 문중에서 초려를 개축해 재실로 사용했는데, 이 부근을 송씨의 재실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재궁동으로 불렸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재궁동이 재강골로 변하고 또 쟁골로 변했다. 그후 군포가 시로 승격되면서 재궁동으로 환원됐다.

군포시청 뒤 현충탑 올라가는 길에 있는 묵음재(默蔭齋)는 여산송씨 재실이다.
송복산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호는 묵재, 할아버지 송윤번은 병조참판(종2품 국방차관), 아버지 송전은 나주목사(정3품 수령)를 지냈다.

감찰과 사농소윤이란 관직으로 시작해서 네군데 현의 수령을 지내고 해주목사에 전임됐으며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원만한 성격과 올곧은 선비 정신으로 승진을 거듭해 형조참판(종2품법무차관), 호조참판(종2품차관) 등을 거쳐 자헌대부(정2품품계)로 판한성부사가 됐다.

송복산은 1469년 78세의 나이로 죽어 군포에 묻혔다.
송복산 묘역은 지금의 군포시 금정동 산 11번지로 군포시청 뒤 묵음재 위의 충혼탑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1482년(성종13)에 건립된 묘비는 아래가 연꽃잎과 구슬 모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오랜세월이 흘러 알아보기가 어렵고,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문인석, 망주석들이 완벽한 형태로 배치돼 있다.

송복산의 아들 송숙기의 묘도 송복산의 묘와 같은 장소에 조성돼 있다.
이처럼 여산 송씨 일가는 오랫동안 재궁골에서 터전을 마련해 살았고, 재궁골은 여산 송씨의 재궁이 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으로 나라에서 송복산 집안에 내린 땅(사패지)이 있는데, 그 일부를 송씨 문중에서 군포시에 기증하여 동산 공원, 현충탑을 세웠고 그 일대에 군포시청, 군포여성회관, 군포교육청, 군포 우체국 등이 들어서게 됐다.

지금도 여산 송씨 재실인 묵음재(默蔭齋)에서는 군포문화원 주최로 매년 성인식을 올리고 있다.

여산송씨정가공파재궁종회(礪山宋氏正嘉公派齋宮宗會)

여산송씨 군포재궁종회(齋宮宗會)는 송복산(宋福山) 후손들이 모여 세거(世居)를 이룬 종친(宗親)이다.
송복산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2품 서울특별시장)를 지냈으며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시키고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자 관직을 사직(辭職)하고 군포시 재궁동(齋宮洞)에 은거(隱居)했다.
군포 지역에서 거주를 시작한 것은 6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고려 말엽부터 이 지역에 기거하고 터를 닦아온 재궁종회는 2010년 현재 6대회장 송지영을 비롯 종회원들간의 친목과 화합, 운영에 있어서 어느 종친회보다도 모범이 되는 종회로 평가받고 있다.
정가공파의 근·현대 인물로는 내각수반을 지낸 송요찬장군이 유명하다.
한때 미국의 정보기관은 송요찬장군이 미국병원에 입원 중일때 송장군에게 접근 한국의 주요정보를 캐려했으나 송요찬 장군은 “나를 죽이고 정보를 캐가라"며 단호히 거절하고 그들을 혼쭐낸것으로 유명하다.
원윤공파에서는 개성원윤 송운의 6세손 송간(宋侃)이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 법무차관)을 지냈으며, 후에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단종 원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여러 고명 대신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단종이 물러나자, 고향인 여산에서 두문불출했다.
단종이 시해되자 그는 산 속으로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김시습, 조상치, 조여, 정지산, 이성희, 이축, 엄흥도와 더불어 8절(八節)로 숭상받았으며 계룡산 동학사의 초혼각과 운곡서원, 숙모전, 세충사 등에 제향됐다.
그의 6세손 송건(宋建)은 임진왜란때 공을 세우고 성주 판관이 됐으며 뒤에 함창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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