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역대인물 중 문인 150여명 배출

송요찬(宋堯讚,1918~1980)은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하고 수도사단장과 제8사단장,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외무부장관, 경제기획원장과 내각수반을 지냈다.
6·25 한국전쟁때는 함흥함락 등 동부전선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워 중공군 2개 사단을 섬멸하기도 했으며, 육군참모총장 재직시 10만 감군, 정군(整軍,흐트러진 군기를 바로잡고 군대를 정비 재편함), 군인연금제도의 신설 등 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시기 좌익 경력 등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박정희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특히 자유당에 의한 3·15부정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4·19혁명 때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국민에게 신뢰감을 부여함으로써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4·19혁명을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충효향인 전남 고흥 고흥군민은 성품은 온유 순진하고 인정이 많으며 의협심이 강하다고 한다.
고흥은 예로부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구국에 앞장섰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란의 충의 의사는 물론 항일 애국지사를 비롯한 반공 애국 충훈 용사 등 수많은 충효열사를 배출한 역사의 고장으로 가는 곳마다 그분들의 발자취가 서려있어 충절의 고장이요 선비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흥지역 역대인물들의 유고와 문집이 남아 있는데 1966년에 발간된 고흥군지에 실린 내용을 정리하면 여산송씨와 고흥류씨, 김해김씨 곡부공씨, 경주김씨 문중에서 많은 문인(文人)들이 배출됐는데,이중 150여 명이 여산송씨 문중인물이었다.
서동사(西洞祠)는 여산송씨, 충강공 송간(宋侃·1405~1480)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1550~1598), 송심(宋諶,1590~1637), 송순례(宋純禮,1528~1597), 송희립(宋希立,1553~1623), 송건(宋建,1558~1592)과 김시습(金時習,1435~1493)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이 사우는 1785년(정조 9) 최초 건립 당시 여산송씨 송간, 송대립, 송심과 고흥유씨 유탁(1311~1371), 영광정씨 정연희(1566~1635) 등을 봉안하기 위해 두원면 운곡리에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
원래 1782년 태학유생 한덕보가 서재 송간을 주벽으로 하는 사우 건립을 발의한데서 비롯돼 흥양유생 신응택, 정효목 등의 노력으로 건립이 결정됐다.
10여년이 지난 1791년 건립당시 주역이였던 정효목 신응택의 주선으로 여산송씨, 고흥류씨, 영광정씨의 분사가 합의됐다.
1796년(정조 20) 서재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대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했다. 1801년(순조 1)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대해 일문 6충사로 불리었다.
1833년(순조 33) 송상보(1564~1597), 송득운(1570~1633), 송석룡(1614~1733)을 추배했고, 1846년(헌종 12) 매월당 김시습을 봉안했다. 1848년에는 원유들의 개호상서에 의해 서동사로 개칭했고, 1868년 전국 서원훼철 때 물훼(勿毁)의 교지가 있었으나 이내 훼철됐다.
1956년 현위치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薺洞書院)이라 하였고 1972년에 송홍연(1569~1629), 송진부(1569~1597)를 추배했다. 같은 경내의 창효사(1980년 건립)에는 효열을 분리해 송석룡, 송명규, 송찬문, 송정규 등을 배향하고 있다. 신실(神室)인 서동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며, 동·서재는 정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이밖에 창효사, 양평문, 내·외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