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덕
대전도시철도공사 사장

얼마 전 장례식장에 들러 조문을 마치고 주차요금을 내고 있는데 바로 뒤 차량이 경적을 울린다. 괜히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빠져 나와 큰 길로 들어서기 위해 잠시 멈췄는데 다시 그 차량이 ‘빵! 빵! 빵!’

혹시 아는 사람이 신호를 보내나 싶어서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쳐다 봤더니 뒷 차 운전자는 다짜고짜 “야! 빨리 가!” 라며 소리를 질러댄다. 얼핏 눈에 잡히는 성급 남들과 위축된 조수석 아내의 모습. 조상이 물려준 성(姓)은 ‘야’ 씨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뒷 차가 전조등을 켜고 요란한 경적을 울려대며 빨리 가라고 위협하자 “그렇게 바쁘시면 ‘어제’ 출발하시지 그랬어요?”라고 대꾸했다는 어느 개그맨의 일화가 뒤늦게 머리를 스쳤다.

청풍명월이라는 말은 꼭 좋은 의미로만 해석되지는 않는다 해도 느긋한 양반의 고장에서 어디로 불나게 가시는지. 대한민국은 신통방통한 나라다. 여러 사람 고생 안 해도 한 방이면 된다. 서양 스포츠인 양궁에는 몇 몇 엘리트 선수를 내보내면 그만이고 피겨스케이트는 김연아, 수영은 박태환, 리듬체조에서도 손연재면 충분하다. 그뿐이랴 토종 류현진 투수가 야구 본고장에서 큰 활약으로 요즘 텔레비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한민국은 신통방통한 나라다. 여러 사람 고생하더니 민주화와 산업화를 한 방에 해결했다. ‘민주주의는 개발도상국에게는 죽음의 키스’라는 주장도 있지만 죽지도 않고(?)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원조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변신했다. 그렇다고 천박한 졸부냐 하면 ‘오천년 역사’를 들먹이며 뼈대 있는 집안임을 강조한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 내세울 수 있는 객관적 실체중 하나가 ‘기록문화 유산’인데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문화유산이 11개로써 세계 4위이며 동양 최다다.

분서갱유, 문화대혁명 또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는 구구한 해석도 있지만 중국은 9개,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수첩에 기록을 한다는 일본은 3개에 불과하다. 숫자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대한민국 국회는 신통방통하다. 자신들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과 대통령기록물 열람에 대해서는 별다른 쌈박질 없이 잘도 합의한다. 관련법에 따르면 대통령기록물 열람은 출석의원도 아니고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한 입법취지는 쉽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열람하지마’라는 얘기다. 로마이야기가 아닌 서울 여의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최근엔 열람한 뒤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활용해 공개하기로 여야 간 합의했다고 한다. 산 넘어 산이다. 앞으로 어느 대통령이 기록을 남기겠는가라는 비판을 넘어서 반만년역사에 유구한 시간일진데 ‘30년’을 참지 못하는 조급함이 더욱 안타깝다. 물론 국가기록물의 정책방향은 생산과 보존 뿐 만 아니라 활용도 아우르고 있지만 생산과 보존이 기본이고 우선이다. 국론분열을 막기 위했다고 하지만 논란의 종결은 의심스럽고 역사의 정체는 우려된다.

천문학자들에 따르면 지구가 있는 태양계가 속해 있는 밀키웨이 은하계는 시속 4만㎞의 속도로 안드로메다 은하계와 가까워지고 있으며, 결국 충돌하게 되는 시점이 50억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하는 밀코메다갤럭시에서의 지구운명을 그렇게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라서 걱정하지도, 걱정해봤자 소용없다는 실용적 사고와 그때쯤이면 지구환경과 비슷한 별로 인류가 이사할 수 있는 기술진보가 이뤄질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걱정이 많은 세상이어서 그렇다. 아시아나항공 여객기 착륙 사고로 숨진 여고생 예멍위안과 왕린자양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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