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충청인

충청도에선 유달리 민족사에 길이 남은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역사 속의 충청인은 한마디로 대단했고, 그들의 정신을 오늘에 계승 발전시킨다면 충청의 미래는 밝다고 확언할 수 있다. 언론인이자 문인인 이광희는 2006년 출간한 ‘충청혼맥’에서 “충청도는 덜떨어진 멍청도가 아니라 충절의 본향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충청인을 “항상 이 나라 역사 발전의 주역으로 살았으며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준 주체였다”고 규정한 바 있다. 충청도가 결코 멍청도가 아닌 충절의 본향이었음은 조선시대 단종 원년, 수양대군의 음모가 천하를 주눅들게 할 때 꼿꼿이 죽음을 택한 성삼문, 김문기, 박팽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의리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충청인은 또한 앉아서 대접받기를 원치 않았고, 이 나라 역사 발전의 주역으로 살았다. 어느 지방보다 진취적인 기질로 국가 대사의 선봉에 섰다. 국가가 수렁에 빠졌을 때 생을 불사르며 조국을 건진 충무공 이순신과 중봉 조헌, 백야 김좌진의 삶이 그러했다. 조국의 낡은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생을 바친 김옥균과 천주교의 뿌리를 만든 김대건 신부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일제 치하 상해 임시정부의 초석을 다진 석오 이동녕의 족적과 의암 손병희, 예관 신규식의 삶도 이런 사실을 확인시킨다. 충청인은 역사 속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준 주체였다. 혹자는 충청인을 가리켜 ‘우유부단하다’ ‘주체의식이 약하다’고 하지만 역사 속에서 충청인은 강직했고, 이민족에게 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일제의 간교한 정책을 간파하고 목숨을 건 면암 최익현의 정신, 서슬 퍼런 일제의 폭압에 맨몸으로 항거한 유관순과 매헌 윤봉길이 이런 일면을 입증한다.충청인은 이와 함께 매우 겸허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보다 반성을 통해 내적 덕망 쌓기를 우선했다. 이 때문에 밖으로는 온유하면서 안으로는 누구보다 강인한 모습을 견지했다. 역사적으로 고불 맹사성,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등의 족적이 이를 대변한다. 최 일 기자 choil@geumgan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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