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년의 '복천·자운' 출생 설화에서 연유
강학년(姜鶴年,1585년(선조 18)~1647년(인조 25), 자는 자구(子久), 호(號)는 복천(復泉)·자운(紫雲))의 본가는 대전 대덕구 신탄진 석봉동(회덕 잔골, 자운리)이다. 강학년(姜鶴年)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효자 강운상의 손자이고 대사간(大司諫, 정3품) 강첨(姜籤)의 아들이다. 그는 외가인 서천군 한산 숭문동에서 출생해 13세에 본가인 회덕 잔골로 돌아왔는데, 복천 또는 자운 이라는 호는 그의 출생 설화에서 연유됐다. 그가 태어날 때, 한산에 있는 고갈된 샘과 어머니 한산 이씨가 그를 잉태했을 때 말라 버렸던 이곳 잔골(석봉동)의 샘이 솟구쳤다 하며, 또한 그가 태어날 때 붉은 구름이 집을 에워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석봉동 잔골에는 그의 본가(本家)가 보존되어 있는데, 안채가 슬래브집으로 개축됐으나 당시의 초석으로 보이는 주춧돌 몇 개와 일부의 목재가 다시 사용됐다.
강학년(姜鶴年)은 25세(광해군 1, 1609년)때 생원(生員)이 됐으나 병이 많아서 출사하지 아니하고 성인의 학문에 침잠했다. 광해군 말년에는 정치가 문란한데다 아버지 상을 당했으므로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섬기면서 숨어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지천 최명길의 천거로 연기현감(縣監, 종6품 수령)에 제수됐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에 그는 천안으로 가서 왕을 맞이했으며, 이때 진천현감이 됐으나 수개월 후 다시 사직하고 돌아왔다가 이듬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조선때 왕세자의 호위를 맡아보던 관아) 사어(司禦, 종5품)가 됐다.
강학년(姜鶴年)은 1627년 후금(後金, 여진족의 족장 누르하치가 1616년에 만주에 세운 나라)이 침입해 조정에서 화의를 논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돌아와 오랑캐와 화의할 수 없음을 상소했다.
1643년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장령(掌令, 정4품 부장검사)이 됐을 때, 공신들에 의한 폐단을 상소했다가 파직돼 은진으로 귀양 가서 1년 만에 본가로 돌아온 10년 후 63세로 세상을 마쳤다.
그 후 1654년(효종 5) 특진관 홍명하의 상소로 신원(伸寃, 억울함을 풀음)됐고, 후에 이조판서(判書, 정2품 장관)에 증직됐다. 일생 동안 청빈했고 의를 내세워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회덕 용호사와 온양의 정퇴서원 등에 배향됐다. 묘(墓)는 온양에 있다.
강호(姜鎬, 1605년(선조 38)~1667년(현종 8), 자(字)는 경숙(京叔))는 회덕의 자운리(잔골, 대덕구 신탄진 석봉동)에서 태어났다.
강호(姜鎬)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효자 강운상의 증손이고 대사간 강첨의 손자이며 장령 강학년의 아들이다. 1642년(인조 20)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에 병과로 급제해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고, 효종 때 사헌부의 정4품 부장검사인 장령(掌令)과 사간원의 헌납(獻納, 임금의 잘못을 간하여 고치게 하던 정5품 사무관)을 거쳐, 서장관(書狀官, 사절단의 기록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조선 태조 때 두었던 세자의 교육 관청) 필선(弼善, 정4품 서기관)을 지내다가 1660년(현종 1)에 다시 장령(정4품부장검사)이 됐고 1665년(현종 6) 길주목사(牧使, 정3품 수령)로 발탁됐다. 1668년 승정원의 승지(承旨, 정3품 당상관)가 됐고 다음해에는 원양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도지사)가 됐다. 그는 회덕 자운리(대전 대덕구 석봉동) 에서 살았으며 묘(墓)는 온양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