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에 능했던 호방한 선비 강혼

강혼(姜渾,1464년(세조 10)~1519년(중종 14),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시호는 문간(文簡))은 대전 대덕구 석봉동(회덕 잔골,자운리)에서 태어났다.

강혼(姜渾)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아버지는 강인범이며 김종직의 문인이다. 현존하는 ‘회덕향안(懷德鄕案)’에 강혼은 ‘유학’과 ‘학생’으로 수록돼 있어 출사하기 전에 이미 회덕의 향원으로 인정받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혼(姜渾)은 20세가 되던 해인 1484년(성종 14)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23세 때(1486년)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에 병과로 급제해 호당(湖堂, 재덕을 갖춘 뛰어난 문신 중에 독서당에서 글만 읽도록 한 제도)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장의사에서 공부만하던 재덕 갖춘 문신)함으로써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형벌을 당하게 됐다.

강혼(姜渾)은 무오사화에서 사림파의 일원이라 심한 고역을 치르기는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곧 방면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시문에서 뛰어나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고, 도승지(都承旨, 정3품 왕의 비서실장)로서 왕을 가까이 보필했는데 당시에 ‘문명(文名)이 김일손 다음이다’라는 칭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강혼(姜渾)은 명리를 지나치게 탐내고 연산군의 애희에 대한 관인애해와 제문을 잘 써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 됐다해 사림의 질타를 받았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 세력이 그를 죽이려 했으나 영의정 유순의 주선으로 반정 세력에 나아가 사죄한 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精國功臣,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 3등으로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승정원의 좌승지(左承旨, 정3품 당상관)를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정2품 대학자인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러 가문을 크게 빛냈다.

이어 공조판서(정2품장관)를 거쳐 1512년(중종 7) 한성부의 판윤(判尹, 정2품 서울시장)이 됐고, 이어 숭록대부(崇祿大夫, 1품품계)에 올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1품), 의정부의 우찬성(右贊成, 종1품 재신)에 이르렀다.

반정 후 강혼(姜渾)은 이윤으로부터 폐조의 행신(幸臣,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라는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세조 정권에 의해 파헤쳐져 물가에 매장된 소능(문종왕비 권씨)의 회복을 앞장서서 주장해 현릉에 합장케 하는 등 사림 정신에 부합되는 주목할 만한 행동을 이루었다. 저서는 ‘목계집(木溪集)’이 있고, 묘소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에 있다.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던 진주 지방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선비와 기녀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목계(木溪) 강혼(姜渾)은 젊은 시절 한때 아리따운 관기와 깊은 사랑을 불태운 일이 있다.

강혼(姜渾)이 기녀와의 사랑에 빠져 있을 때 공교롭게도 진주 목사가 부임해 왔다. 새로 온 목사가 기녀들을 일일이 점고하는데 강혼(姜渾)의 연인인 기생이 목사의 눈에 들어 수청을 들게 됐다. 강혼(姜渾)은 사랑하는 기녀를 속절없이 빼앗기게 됐다. 더욱이 관기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혼(姜渾)은 북받쳐 오르는 분함과 연정을 주체할 수 없어 수청을 들러 가는 기녀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한 수의 시를 소매에 써주었다. 강혼(姜渾)의 행동에 놀란 기녀는 저고리를 갈아입을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엉겁결에 신관 목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쫓기 듯 들어서는 기녀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발견한 목사는 그 연유를 물었다. 시를 써 준 사람이 누구냐고 다그쳐 묻는 말에 기녀는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목사는 급기야 강혼(姜渾)을 잡아들이라는 호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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