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에 밝았던 강회백

진주강씨 중흥조(中興祖)인 국자박사(國子博士, 국자감의 정7품) 강계용(姜啓庸,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의 중시조(中始祖))은 1274년(고려 원종 15) 통신사(通信使, 일본에 가던 사신) 김방경(金方慶, 안동김씨 중흥조)을 따라 서장관(書狀官, 일본으로 가던 사신을 수행해 기록을 맡던 임시 벼슬)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진주강씨 박사공파(博士公派)는 강계용(姜啓庸)의 손자 강사첨(姜師瞻)이 어사(御史, 임금의 특명을 받아 지방 정치의 잘잘못과 백성의 사정을 비밀리에 살펴서 부정 관리를 징계하던 임시 관직)를 지낸 까닭으로 어사공파(御史公派)라고도 한다. 박사공(博士公) 강계용(姜啓庸)의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세 아들 대(代)에서 다시 분파(分派)했다.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姜淮伯, 1357(공민왕 6)∼1402(태종 2).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 둘째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정공파(通亭公派)의 강회백(姜淮伯)은 진주(晉州, 경상남도 진주시) 사람으로 할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종1품 문산계 품계) 강군보(姜君寶)이며, 고려때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2품 부총리)를 지낸 강시(姜蓍)의 아들이다.

강회백 행장.
강회백(姜淮伯)은 우왕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거듭 승진해 밀직부사(密直副事, 정령을 출납하던 밀직사의 3품 장관급),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고려 시대에 둔 밀직사의 으뜸 종2품 벼슬) 겸(兼) 이조판서(判書, 정2품 장관), 고려 말에 대사헌(大司憲,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재상급이 맡은 군사 및 민사를 모두 관장하며 외침이 있을 때 작전을 지휘함, 고려말에 설치됐으며 1389년(공양왕 1)도절제사로 고침)에 올랐으며 성리학에도 밝았다.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로 개성유수(留守, 2품 지방장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돈녕의 친목을 꾀하던 돈령부의 벼슬) 등을 지냈으며 글씨에 능했다.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의 아들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通亭公派)의 대표적 인물이다.

강석덕(姜碩德,1395~1459)은 음보(蔭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훈(功勳)이나 음덕(蔭德)에 의해 특별한 대우를 받아 관직을 얻거나 벼슬에 보임됨)로 관직에 진출해 1416년(태종 16) 공조좌랑(佐郞, 정6품 주무관), 1444년에는 호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 1445년 백관을 규찰·탄핵하던 사헌부의 수장인 종2품 검찰총작격인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강석덕의 묘(墓)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능말일대 진주강씨 묘역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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