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찾아온 추석 일상 고단함 털고 고향으로

주머니 얇지만 마음은 기쁘게

보름달 보며 소원 빌고 가족과 함께 정나눠

달빛 좋은 날, 좋은 사람과 보름달처럼 풍성한 정(情)을 나누는 추석(秋夕)이다. 가을의 중턱, ‘중추절(仲秋節)’로 표현되곤 한다. 순우리말로 하면 가을의 한 가운데 있다고 해서 ‘가위’라 하고 여기에 큰 명절의 의미가 더해져 ‘한가위’로 부르기도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듯이 추석은 넉넉하고 풍요롭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0년대 중반에도 추석은 풍성했다. 물건과 사람들이 빈틈없이 들어찬 시장엔 활기가 넘쳤다. 이 때만 해도 민족 대이동은 없었다. 귀성행렬이 나타난 건 1960년대부터다. 단벌 양복 잘 다려 입고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표 구하기 전쟁’은 1970년대 들어 나타나기 시작됐다.

서울 인구가 급격히 늘어 추석 기차표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표를 사기 위해 서울역 앞에서 신문을 깔고 밤을 지새웠다. 1980년대 들어선 추석 휴가를 보내주는 기업이 늘기 시작했고 80년대 중후반, 사흘 추석연휴가 공식화 됐다. 자가용 보급도 폭발적으로 늘어 도로까지 꽉 막히자 1990년대부턴 시골 부모들이 서울로 올라오는 ‘역귀성’ 현상도 나타났다. 지금은 추석연휴 기간중 해외 여행가서 인터넷으로 차례를 지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같은 추석 명절 풍경의 변천사엔 산업화와 핵가족화로 대표되는 사회 흐름의 변화상이 오롯이 담겨 있다.

도시생활의 고단함을 한껏 털어내고 고향으로 향하는 길, 마음은 가벼워도 빈 손 일 순 없다. 무슨 선물을 사가야 하나 고민이 많을 텐데 추석 선물 문화도 많이 변했다.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달걀 한 꾸러미, 돼지고기 두 근, 참기름 한 병 같이 식생활에 보탬이 되는 걸 주고받았다. 1960년대엔 설탕이 당시 최고의 선물이었고 백화점에서 추석선물 신문광고가 나온 것도 이때였다. 1960년대 중반엔 라면 한 상자, 맥주 한 짝, 세탁비누 세트 같은 게 나오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진전되고 이에 따라 소비 수준도 획기적으로 변하면서 1970년대엔 추석선물도 큰 변화를 보였다. 플라스틱 그릇, 라디오 등 경공업제품과 화장품, 여성속옷, 과자, 양산 등이 선물로 각광받았다. 특히 커피가 추석선물 목록에 추가되면서 대세를 이루기도 했다. 70년대 후반엔 텔레비전, 전기밥솥, 가스레인지 등 가전제품이 추석선물로 집중 소개되기도 했지만 이 흐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금새 흔해져 버렸다. 1980년대부턴 선물의 폭이 3000여 종으로 늘었고 특히 넥타이, 지갑 같은 잡화류가 보편적인 선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엔 한동안 발행이 금지됐던 상품권이 다시 등장하면서 대세를 이뤘다. 요즘은 실용적인 중저가 상품이 인기고 웰빙에 대한 욕구 증대로 건강(보조)식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물론 선물 양극화도 갈수록 심해져 한 때 수 백 만 원대 와인이 나오기도 했다.

얼마 전 조사에선 절반가량이 가장 주고 싶은 선물로 과일·건강식품·통조림 같은 것들을 꼽았는데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을 묻자 절반가량이 상품권을 선택했다. 선택의 다양성, 간편성, 편의성을 두루 갖춘 게 상품권이 가진 매력이다. 추석 선물 비용은 평균 20만 원 정도로 집계됐다. 지난해와 비교해 주머니 사정이 조금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선물 가격보다 마음을 전하는 게 가장 큰 의미라는 거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감동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추석 보름달은 어김없이 떠오르고 이제 또 다시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고향 가는 길, 여유를 가져야 뜻하지 않는 사고와 맞닥뜨리지 않는다. 파란 하늘, 청명한 달빛 아래 고향에서 솔내음 가득한 송편을 나눠먹으며 정을 나누려면 무엇보다 안전한 귀향길이 최우선이다. 모처럼 긴 연휴, 고향의 넉넉함 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평온한 시간을 가져보시길.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