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년, 수양 논한 '한계만록' 편저

강백년(姜栢年,1603~1681, 시호는 문정(文貞))의 자(字)는 숙구(叔久), 호는 청월헌(聽月軒), 설봉(雪峯), 한계(閑溪)이다. 강인(姜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운상(姜雲祥), 아버지는 강주(姜蟬), 어머니는 안동김씨 김응서(金應瑞)의 딸이고, 부인은 안동김씨 김광수(金光燧)의 딸이다.

강백년이 죽은 후 후손들은 사패지(賜牌地: 나라에서 내려준 땅)인 공주시 의당면 도신리에 묘소를 마련하고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강백년(姜栢年)은 1627년(인조5) 정시(庭試: 비정기적으로 시행하던 과거시험 일종)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 봉박을 담당한 사간원의 정6품), 장령(掌令: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4품 부장검사)을 지냈다.

1646년(인조 24) 강빈옥사(姜嬪獄事, 1646년(인조 24)에 일어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에 관련돼 그의 비인 강씨(姜氏)가 사사(賜死)되고 강빈의 인척이 처형된 사건)가 일어나자, 부교리(副校理, 홍문관의 종5품 관직)로서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삭직(削職, 삭탈관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음)을 당했다.

그러나 같은 해 문신중시(일명 문과중시(文科重試, 10년마다 병년(丙年)에 당하관인 문신에게 보이던 승진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에 올랐다.

이듬해인 1647년(인조 25) 향교 부흥에 관련된 상소를 올렸으며, 1648년 다시 강빈의 신원(伸寃, 억울함을 풀어줌)을 상소하다 청풍군수(郡守, 종4품 수령)로 좌천됐다.

1653년(효종 4) 승정원의 당상관인 좌승지(左承旨, 정3품)까지 올랐으며, 충청도관찰사(觀察使, 종2품감사)와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후 1660년(현종 1) 동지부사(冬至副使, 동짓달에 중국에 가던 사신의 두 번째 서열)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70년(현종 11)에 도승지(都承旨, 정3품 왕의 비서실장)와 이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을 역임한 뒤 현종이 죽자 그 시책문(諡冊文: 선왕의 시호를 올릴 때 그 생전의 덕행을 칭송한 글)을 지었고 예조판서(정2품 장관), 의정부의 우참찬(右參贊, 정2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종1품)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편저인 한계만록(閑溪謾錄)과 약간의 시문(詩文)이 들어 있는 설봉집(雪峯集)이 있다.
한계만록은 대학(大學)의 8조목(八條目)을 중심으로 세부적인 수양 공부를 논하고 있다. ‘한계만록’에는 경서(經書)와 송대(宋代) 유학자들의 저술들인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주자가례(朱子家禮), 심경(心經) 등과 조광조(趙光祖) 등의 선인들의 언행에서 해당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이 폭넓게 수록되어 있다.

묘소는 충남 공주시 의당면 도신리에 있으며, 비문은 임상원(任相元)이 찬(撰, 지음)하였다.
울산시 정퇴서원(靜退書院), 부산 동래구 수안동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청주의 기암서원(機巖書院)에 배향돼 있다. 2002년 후손들에 의해 “문정사”라는 사우가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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