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곡촌 택지엔 진주 강씨 흥망성쇠 사연 서려 있어

기록을 보면 봉란대(鳳卵臺)와 강씨(姜氏) 구기택지에 대한 내력이 있다.
대봉산(大鳳山)은 진주(晉州)지방의 뒷산으로 현재는 비봉산(飛鳳山)이라고 한다. 봉곡촌(鳳谷村)은 진주시 상봉동동(上鳳東洞)과 상봉서동(上鳳西洞) 두 동을 합친 마을 이름이다. 옛날 이 봉곡촌에는 진주강씨 선조들이 마을을 이루고(自作一村: 자작일촌) 강씨(姜氏)들만이 집단으로 살았다고 한다.
이 봉곡촌(鳳谷村) 택지(宅誌)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의 흥망성쇠와 파란곡절이 얽히고 설킨 대봉산(大鳳山) 봉지(鳳池: 봉의 연못, 봉서지), 봉암(鳳岩: 봉바위), 봉란대(鳳卵臺: 봉알자리), 봉강재(鳳降齋)의 피눈물나는 사연들이 있다고 한다.
고려 때는 강씨(姜氏)들이 정부 요직 높은 벼슬자리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세도가 대단했다. 영상서(領尙書: 상서는 정3품 장관) 정절공(正節公) 강구만(姜九萬: 서기 931∼975)의 집(봉곡촌)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이 바위위에 또 하나의 작은 바위가 얹혀져 있어, 보기에 크고 작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흡사 봉(鳳 : 봉황)의 형상과 같아 봉바위(鳳岩)라 불렀다.
어느날 강남도사(江南道士)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바위를 보고 “강씨지대성(姜氏之大盛)이 유차암고야(有此岩故也)”라, 즉 강씨(姜氏)들의 대성함이 이 바위로 인해 그렇다고 했다. 그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정2품 부총리), 문하시중(門下侍中: 백관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 평장사(平章事: 정2품 부총리)를 지낸 강홍(姜洪:1010∼1122년)대(代)에 이르러 형제 11명이 경상(卿相: 종1품 정승과 정3품 장관)으로써 한나라의 정권(政權)을 한 문중에서 장악하다시피 했는데, 호사다마(好事多摩)라고 남이 잘되는 일에 시기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합문지후(閤門祗候: 고려때 조회(朝會), 의례(儀禮) 등 국가 의식을 맡아보던 합문 소속의 관직이며 합문이 처음 설치된 목종 때 두었으며 문종때 정원 4명으로 정7품 벼슬) 이지원(李之元)이 그 세력을 시기해 임금에게 강씨(姜氏)를 모함하고, 사람을 몰래 시켜 봉바위를 부숴버렸다.
그 바위 속에서 함박같이 생긴 흰돌 네개가 들어 있었는데 이를 철추(鐵椎)로 부수자, 새빨간 피가 흘렀다고 한다.
그후 고려 인종때 척준경(拓俊京,?~1144, 황해도 곡산 출신)이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상서강홍(尙書姜洪:상서는 정3품 장관)의 형제 일당이 불의의 앙심을 품고 있으니 속히 조처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 했다.
이말을 들은 인종(仁宗)은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하면 강홍(姜洪)일가의 세력을 꺾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척준경은 “강홍(姜洪)과 그의 도당(徒堂)을 내치시고 그들의 향토(鄕土)인 진주(晉州)의 명소(名所) 지명을 고치소서” 하자, 인종은 그말이 옳다고 여겨 상서공(尙書公) 강홍(姜洪)의 형제와 일족을 죽이고, 대봉산(大鳳山)의 이름을 ‘봉을 날려 보낸다는 뜻’으로 비봉산(飛鳳山)으로 고치고, 봉지(鳳池: 봉 연못)의 명칭을 “봉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으로 부지(釜池:가마못)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그후 강씨(姜氏)들은 한순간에 망하고 말았다. 남에게 나쁜짓을 한 자는 그 댓가를 받는 법, 그래서 인지 척준경도 그후 1126년 반역(返逆)을 도모하다 실패하고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많은 강씨 후손들이 번성하고 권력 또한 회복돼 전날 선조들의 세도를 꿈꾸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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