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 토족 성씨로 시조는 안자미

흥위위(興威衛)의 보승별장(保勝別將: 정7품)을 지내고, 신호위(神虎衛, 신호위는 고려때의 군제 6위의 하나로 국토방위를 담당했음. 좌우위, 흥위위와 더불어 3위라함. 3위는 개경의 수비, 변방의 수비임무도 지고 있는 경군의 핵심 주력부대로 총 병력은 7000명이었음)의 상장군(上將軍: 상장군은 정3품, 또는 같은 정3품인 상호군(上護軍: 조선때 바뀜))으로 추봉된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가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해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됐다.
한편, 보승(保勝)은 고려때 경군(京軍)과 주현군(州縣軍)을 구성한 단위부대이다.
보승(保勝)은 경군(京軍)의 6위(六衛) 중에서 좌우위(左右衛)에 10령(領, 1령은 1000명), 신호위(神虎衛)에 5령, 흥위위(興威衛)에 7령이 소속되어 있어 도합 22령에 2만 2000명이 배치돼 있었다.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는 경군(京軍)의 3위라 불렸던 부대로서, 개경수비는 물론 변방수비 임무까지 담당했던 경군의 핵심 주력부대였다. 지방의 주현군에도 약 8601명이 배치돼 있었다.
이 중 2군(軍)은 응양군과 용호군으로서 친위대였으며, 6위는 좌위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로 이 중 흥위위는 왕의 행차를 호위하고, 외국 사신 송영 및 국가의 행사에 참여하고, 출정과 변방방비를 책임진 군대였다.
흥위위는 1만 2000명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보승(保勝) 7령(領)과 정용(精勇) 5령으로 조직돼 있었다.
보승별장이라 함은 홍위위의 보승 7령 중, 정7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한 군대에서 부지휘를 맡고 있는 무관직인 것이다.
별장(別將) 밑으로 산원이나 위, 대정이 있고, 별장 위로는 낭장과 중랑장(정5품), 장군(정4품), 대장군(종3품), 그리고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 정3품)이 있다. 별장직도 군대내에서 꽤 높고 신임있는 관직이었다.
후 증손 안유(安裕, 향(珦)으로 개명했다가, 조선 문종 임금 어휘와 같게 되어 초명으로 씀)가 크게 현달하여 생활 근거지가 개성으로 나뉘어져 살게 됐다. 시조 안자미(安子美)의 아들 3형제를 뒀는데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이며 이를 각각 1파(派), 2파(派), 3파(派)라 부른다.
안영유(安永儒)의 후손에 14개파(派), 안영린(安永麟)의 후손에 4개파(派), 안영화(安永和)의 후손에 4개파(派)가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생활근거지가 파주 금촌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종가(宗家)는 서울 도동에 있다가 다시 이북 연백으로 옮겨졌다.
특히 관향지(貫鄕地) 순흥에 살던 종족들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돼 화를 입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