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제1파조의 파조들③
이후 방손들의 제단과 합해졌다가 1988년 순흥 읍내리 비봉산 아래에 추원단(追遠壇)을 조성해 이설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전국의 후손 2000여 명이 참배하고 세사를 올린다.
갑신파보(甲申派譜, 1824 순조23년)에서 후손 안기명(安其命)이 진위(振威)에 사는 종친의 가첩의 기록에 근거해 ‘시조의 묘소는 동마암(東磨岩)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로서 추밀부사 정광서(丁光瑞)의 따님이다’ 했다.
이는 이전 족보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실인데, 이전에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의 집에 소장된 구보(舊譜)에서 내사령(內史令) 정혁황(丁奕煌)의 사위에 안자미(安子美)로 기록하고 그 아래에 외손으로 태사공과 문성공의 휘를 기록했다. 이 사실은 족보에 정식으로 올리지는 못하고 참고자료로 전하고 있다.
한편, 안씨(安氏)의 초조(初祖) 안원(安援)은 본래 당나라 종실(宗室)인 농서이씨였는데, 서기 807년(당나라, 헌종2, 신라 애장왕 8년)에 신라로 건너와 개성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정착해 살았다.
그 후 경문왕 때 와서 갑신난(甲申亂)이 일어나자 지춘(枝春), 엽춘(葉春), 화춘(花春) 아들 삼형제가 난(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안(安)자(字)로 사성(賜姓)했다.
맏이 지춘(枝春)은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命)돼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고, 둘째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으며, 셋째 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순흥안씨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광주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근거가 없다며 현재 순흥안씨 대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찍이 학문과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명망을 떨쳤던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시조 안자미(安子美)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안영유(安永儒:一派, 부사공 府使公, 부사는 고려 때 개성부의 수령, 또는 대도호부사로 지방장관), 안영린(安永麟:二派, 별장공 別將公, 별장은 정7품 무관), 안영화(安永和:三派, 교서랑공 敎書郞公, 교서랑은 비서성의 정9품), 고려증전리정랑순흥안공 휘 영화 세사단(高麗贈典理正郞順興安公 諱 永和 歲祀壇)을 파조(派祖)로 하는 3형제 대(代)에서 가세(家勢)가 일기 시작해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했다.
▲순흥안씨 족보(族譜)
순흥안씨 족보(族譜)는 안동권씨 족보인 성화보 발간 70년후인 1546년 명종원년(明宗元年) 병오년(丙午年)에 처음으로 발간해 여러 성씨(姓氏)로 보면 비교적 빠르게 발간이 됐다.
당시 경상감사(慶尙監司, 종2품 도지사) 시조공(始祖公) 안자미(安子美)의 14세(世)인 문희공(文僖公) 안현(安玹)과 그의 백형(伯兄, 맏형)인 당시 파주목사(波州牧使, 정3품수령)였던 문간공(文簡公) 안위(安瑋)형제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것이라고 문헌과 순흥안씨 대종회에서 밝히고 있다.
문희공(文僖公)이 관향지(貫鄕地)인 순흥을 돌아보고 종사(宗事)의 중요성을 통감해 우선 족보부터 간행해야 된다는 것을 결심하고 백형(伯兄) 문간공과 족형(族兄)인 죽창공(竹窓公, 안정(安珽),그리고 종친 생원공 안승종(安承宗)을 만나 서로 의논하고 한양 종가댁(宗家宅)인 죽창공댁에 보청(譜聽,족보 만드는 본부)을 설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