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처결에 뛰어난 재능보인 김승경

<김승경(金升卿)>

공(公)의 이름은 승경(升卿), 자(字)는 현보(賢甫), 본관은 경주(慶州)로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부(金溥)의 후예이다.

공(公)의 증조 제숙공(齊肅公) 김균은 태조 때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고, 벼슬이 숭록대부(崇祿大夫, 1품 품계)로 계림군(鷄林君)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김중성(金仲誠)은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봉상시는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해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됐던 관서)를 지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2품 국방장관)에 증직됐다.

아버지 김신민(金新民)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품계)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2품)인데 남양(南陽)의 대성(大姓) 홍수명(洪守命)의 딸을 아내로 맞아 선덕(宣德) 5년 경술(庚戌, 1430년 세종 12년)에 공을 낳았다.

김승경(金升卿)의 아버지 김신민(金新民)은 1426년(세종, 8년) 병오(丙午)에 식년시(式年試, 3년마다 보던 정기 과거) 동진사(同進士, 고려 및 조선 초기 문과 급제자의 등급 중 제술업에 급제한 사람의 등급) 6위로 합격했다.

김승경(金升卿)은 경태(景泰) 계유년(癸酉年, 1453년 단종 원년) 사마시(司馬試, 진사시험)에 입격하고 병자년(丙子年, 1456년 세조 2년) 과거에 급제했는데, 급제하기 전에 재명(才名)이, 벼슬하고 나서 현명(賢名)이 각각 있었다.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에 정과로 급제해 벼슬이 예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종2품 대사헌(大司憲, 검찰총장)에 이르렀다. 그는 벼슬길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자질과 명성이 세상에 알려졌고, 또한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했다.

승정원에 재직할 때 직무에 충실하고 행정능력이 뛰어나, 왕에게서 금띠(금대, 金帶)를 내려받기도 했으며, 특히 송사처결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 이력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하관(堂下官)으로는, 형조(刑曹), 호조(戶曹)의 낭관(郎官)과 종부시 정(宗簿寺正,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인 종부시의 정3품), 봉상시(奉常寺, 봉상시는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해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의 정(正, 정3품),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 백관을 규찰하던 대검찰청의 검사장)를 지냈다.

당상관으로는 병조 참지(兵曹參知, 정3품 국방차관보)를 지냈으며, 병조(兵曹, 국방부)를 거쳐 승정원(承政院, 왕명을 출납하던 관아, 왕의 비서기관)에 들어가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가 되고 여러 번 옮겨서 좌승지(左承旨, 정3품)에 이르렀다.

2차례 도승지(都承旨, 정3품 왕의 비서실장)가 됐는데 왕명의 출납을 합당하게 했고, 세 번 대사헌(大司憲, 종2품 검찰총장)이 됐다.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종2품 도지사)가 됐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호조, 예조(禮曹), 공조(工曹), 형조의 참판(參判, 종2품 차관)이 됐는데 다 명성과 실적이 있으므로 선조가 후하게 대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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