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조광조와 함께 혁신정치 시도
기묘사화 때 서른여섯 나이 생 마감
경주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김약선 딸은 충렬왕을 낳고 바로 죽었는데 남편 원종(元宗)이 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정순왕후로 추봉됐다. 다시 아들 충렬왕이 즉위해 순경태후로 추존됐다. 1305년(충렬왕 31년) 황려현(黃驪縣)이었던 여주는 태후가 탄생한 고장이라 하여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됐다. 시호는 장익(莊翼)이다.
김태서는 경주김씨에서 분관해 전주김씨의 1세조가 됐으며,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와 김정은이 전주김씨이다.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 묘지명 탁본이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묘지명(墓誌銘, 묘의 봉분앞에 기록을 새겨 묻음)은 1784년(정조8년)에 유지(幽誌)를 발견하고 개봉(改封)했으며 1849년(헌종 15년) 후손인 경주김씨 김정집(金鼎集)이 개성유수(開城留守, 2품 지방관)로 부임해 묘비(墓碑)를 세웠다고 한다.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판도판서는 호부상서로 고치기 전의 정3품 장관) 파조인 김장유는 고려말에 나라가 혼란해지자 충북 보은에 은둔해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장유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 정5품) 김효정의 아들 김정(金淨, 호 충암)이 중종때의 명신으로 유명하다.
그는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기 위해 혁신정치를 시도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에 남곤, 심정의 수구파가 조광조, 김정 등의 신진 도학자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화)가 일어나 서른여섯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기묘명현으로 일컬어졌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충암 김정(金淨)이 증광문과(增廣文科, 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기념으로 보이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 사간원의 정6품)을 거쳐 순창군수(郡守, 종4품 수령)로 나가있을 때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旨, 승정원의 정3품) 이항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춰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있는 말은 하나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에서 하명하는 듯 한 말투였다. 이에 김정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를 써넣었다고 한다.
‘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 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여, 편지쓸 즈음에 옛 벗을 생각이나 해 봤는가’이 시(詩)에 앙심을 품은 이항은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정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다 한다.
충암 김정(金淨)은 제주로 귀양 가다가 해남의 바닷가 노송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약을 받을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충암 김정(金淨 1486~1520, 자는 원충이고 호는 충암과 고봉)은 중종2년(1507년)에 문과(文科, 대과)에 장원급제하고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 도승지(都承旨, 승정원의 정3품 왕의 비서실장)를 거쳐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 정3품)과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 예문관은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던 관청인 예문관의 제학은 종2품)을 지냈다.
정암 조광조 등과 함께 미신타파와 향약의 전국 시행을 위해서도 힘썼으나 지치주의를 위한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로 사사됐다. 그를 기리는 사우가 대청댐 주변에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말함)로 모셔져 있다. 충암 김정 묘소는 대전시 동구 신하동 268-5번지에 있으며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됐다.
김정(金淨)은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됐지만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됐다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돼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됐다. 1545년(인종 1년) 복관됐고 1646년(인조 24년) 영의정에 추증됐다.
대전시 대덕구 동면 내탑리에 있던 건물과 묘소를 1978년에 동구 신하동으로 옮겼다. 건물 안에는 인조 19년(1641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와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 있다. 충암은 보은 출신이며 김호(金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처용(金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 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종5품) 허윤공(許尹恭)의 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