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의 또다른 영웅 김혁

오석(烏石) 김혁(金爀, 1875~1936년, 본명은 학소, 호는 오석)은 육군 참령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용인학원(龍仁學院)을 거쳐 1892년 3월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해 3년 동안 군사학을 전공했다. 1897년 4월에 무관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보병참위로 임관됐으며, 그 뒤 육군참령(陸軍參領)에 승진됐다.

1907년 8월 한국군이 해산을 당하자 일제와 싸울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용인에 돌아가서 청년들을 규합, 항일사상을 고취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남만주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에 망명했다.

같은 해 8월 김호(金虎) 등과 함께 수백 명의 애국청년들을 모아 흥업단(興業團)을 조직, 단장에 김호를 추대하고 그는 부단장으로서 항일투쟁에 전력했다. 이듬해 9월경에는 봉천성 안도현(安圖縣) 삼인방(三人坊)에서 홍범도(洪範圖), 지청천(池靑天) 등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돼 활약했다.

청산리전투를 겪은 다음 1921년 1월에 영안현(寧安縣) 밀산(密山)에서 서일(徐一), 홍범도, 지청천, 김좌진(金佐鎭) 등과 합세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용군,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독립단, 광복단 등 만주의 10개 독립군단체를 통합,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다. 이때 군사부장에 선임돼 노령(露領)에서 항전하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었다.

1925년 3월 15일 영안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돼 활약했다. 신민부가 목릉현(穆綾縣) 추풍(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교장을 겸임해 500여 명의 사관생을 양성, 독립운동 요원을 안정적으로 배출했다.

그 뒤 조선혁명군을 창설해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과 합작하고 중한연합군(中韓聯合軍)을 편성, 항전했다. 1927년 2월 중동선(中東線)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신민부총회 개최중 일본과 만주 경찰 합동수색대의 기습을 받고 항전하다, 박경순(朴敬淳), 유정근(兪政根), 이춘섭(李春燮) 등 1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서에 유치됐다가 이듬해 3월 20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다. 그 해 4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 최종 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했다. 그 뒤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됐다가 1936년 8월 25일 가출옥해 고향 용인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청산리 전투의 또 다른 영웅 김혁 장군을 아시나요>

매년 3·1절에 정부와 민간에서는 각종 기념 행사 마련에 분주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민족을 위해 산화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 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청산리전투의 또다른 영웅 김혁(金爀) 장군도 그 중 한명이다. 만주의 독립운동가를 떠올리면 김좌진 장군이나 홍범도 장군을 선뜻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김혁 장군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김혁 장군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 등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등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지난 2002년 국가보훈처에서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전까진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김혁(본명 김학소 金學韶) 장군은 조선조 중기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중시조 김원립 선생의 후손으로 1875년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용인향교에서 당시 한강이남의 대유학자로 알려진 맹보순(孟輔淳)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장군은 1898년 6월 대한제국무관학교 제1기생으로 입교, 각종 군사학과 언어학을 익혔다. 1900년 1월 고종이 직접 수여하는 졸업장을 받고 육군 참위로 복무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강제 조약이 맺어지고 2년 후인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향교 동창생 이대선, 이영선, 김학조 등과 고향에서 구국운동을 모색했다.

1910년 한일 강제합방이 이뤄지자 장군은 당시 국조 단군을 섬기는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문해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전국민적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1919년 3월, 장군은 고향에서 안정옥, 이덕균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한 후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같은해 5월 중국 봉천성 무송현으로 망명해 서간도 지역의 대종교 독립운동 단체를 찾아가 흥업단 부단장으로 활약했다.

1920년에는 홍범도, 이청천 등과 의용군을 조직해 본격적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들어 청산리대첩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한편, 1921년에는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 이듬해인 1922년에는 8개 독립운동단체 71명이 모여 대한통의부를 조직, 이어 1924년에는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해 항일독립전쟁에 전념했다. 자유시참변 이후 1925년 3월 김혁 장군은 북만주 독립군 단체의 통일 조직인 신민부 결성을 주도해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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