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17) 기계유씨(杞溪兪氏)-4

경서(經書ㅡ, 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와 사서의 깊은 뜻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명석하게 풀이해 줌으로써 의문을 없애 주었고, 심지어 불교까지도 널리 통달했다.
언젠가 상서(尙書, 정3품 장관) 박인석(朴仁碩)의 집에 들른 일이 있었는데, 박인석이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는지라 극진히 예우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이 사람은 신령스러운 야광주 같은 사람으로 아무리 구해도 얻지 못할 것인데, 스스로 찾아왔으니 어찌 예우하지 않으랴?”하고 대답했다.
강종이 태자로 있을 때 발탁해 막료(幕僚, 조직의 목적 달성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며, 대내적으로 관리적 기능과 정책조언 기능을 수행하는 참모조직)로 삼았고, 과거에 급제하자 시학(侍學, 고려 시대에 동궁에 속한 벼슬로 공양왕 2년에 보덕으로 고침)으로 임명했다.
뒤에 강종이 강화(江華, 인천광역시 강화군)로 추방되자, 유승단도 배척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희종 때 비로소 남경사록참군사(南京司錄參軍事)로 임명됐으나, 남경유수(南京留守, 2품 지방장관) 최정화(崔正華)와 틈이 생겨, 심악감무(深岳監務, 큰 현의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로 강등되자 부임하지 않았다.
고종이 어렸을 때 또한 그의 밑에서 공부했는데 즉위하자 수궁서승(守宮署丞, 행사 때 쓰는 장막을 준비하고 설치하는 일을 맡아본 관청으로 문종 때 영은 2명에 품계는 정8품, 승은 2명에 정9품으로 정했음)으로 임명하고 두터운 총애를 베풀었으며 그를 사부(師父)로 삼았다.
이후 예부시랑(禮部侍郞, 정4품 차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정3품)를 역임하고 참지정사로 승진했다.
몽고의 대군이 경기지역으로 침입하자, 최이(崔怡)가 재신(宰臣, 고려시대 재부에 속한 2품 이상의 재상들로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상층 구성원으로 성재라고도 한다. 재신은 임금과 더불어 백관을 통솔하고 국가정책을 의논함), 추신(樞臣, 고려시대 중추원의 재상급 관원으로 일명 추밀이라고도 한다.
추신은 중추원의 상위 조직으로 군사기밀 또는 군사기무로 해석되는 군기에 관한 정사를 맡아봄)들을 모아놓고 강화천도(江華遷都)를 의논했다.
당시 평화가 오래 지속돼 개경의 호수가 10만에 이르렀고, 호화로운 저택이 즐비했으며 사람들은 제 땅에 안착해 떠나기를 싫어했다.
1225년 정방(政房, 고려 후기 인사행정을 취급하던 기관으로 지인방)과 차자방(箚子房)으로도 불렸다. 최이가 인사의 처리를 위해 1225년(고종 12년), 그의 사제에 설치한 기관으로서 최 씨 정권의 중요한 집권기구의 하나)을 설치해 인사권을 장악한 최이(崔怡, 고려시대의 권신으로 1219년 추밀원부사로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했다. 개경의 황라성을 수축하는 등, 몽골의 침입에 대처했음, 원래 이름은 최우)를 두려워해 감히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유승단이 홀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도리에 맞는 일이니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귄다면 저들인들 또한 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괴롭히겠습니까? 도성과 종묘사직을 내팽개치고 섬에 숨은 채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변방의 백성과 장정들을 적의 손에 죽게 만들고 노약자들을 노예로 잡혀가게 하는 것은 국가를 위한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라며 반대했으나, 최이(崔怡)는 듣지 않았다. 고종 19년(1232년)에 사망했다고 역사에 전한다. 시호는 문안(文安)이고 아들은 없다.
중시조(中始祖) 유승석(兪承碩)의 아들 유수기(兪守基)가 별장(別將, 용호영의 종2품 주장 主將)을 지냈고, 손자 유서(兪瑞)가 승봉랑(承奉郞, 고려 때 문관 정6품에서 종8품)을 지내고, 중문지후(中門祗侯, 고려 충렬왕 때 통례문을 고친 정7품)를 지냈으며, 증손 유요(兪堯)가 봉선대부(奉善大夫, 종4품 문산계)로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서운관은 천문과 역일 등의 일을 맡아본 관청이며 종4품)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는 유요(兪堯)의 아들 유사철(兪師哲)이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에 올라 이름을 떨쳤으며, 손자 유헌(兪獻)이 세종 때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품계)로 예조참판(禮曹參判, 종2품 차관)을 지냈다.
유헌(兪獻)의 4세손 유진(兪鎭)이 세조 때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하고, 병조정랑(兵曹正郞, 정5품 전랑이라 함)을 거쳐, 직제학(直提學, 홍문관과 예문관의 정3품)에 올라 명성을 떨쳤고,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副提學, 정3품 당상관)으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3품 부제학과 승지가 겸했으며 왕에게 경서를 강론한 명예로운 직이 참찬관)을 겸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