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유씨(杞溪兪氏) 약사(略史)

신라 때 좌아찬이란 벼슬을 했는데 자세한 것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후손에 유의신(휘, 義臣)은 신라가 망해 고려에 복종하지 아니하니 고려 태조가 미워해 기계호장으로 좌천했다.
그 후 유의신 공의 후손들이 기계인이 됐는데 신라시대 기계유씨 세거지인 경북 포항시 기계고현에 시조 유허비가 있다.
이에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는 까닭으로 고려전기에는 여러 대 은둔생활을 했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그 후손의 일족이 경기도 남쪽지방에 이주하면서 다시 벼슬에 뜻을 두어 득선(得瑄, 좌복야), 선(봉익대부판도판서), 승계(承桂, 봉익대부판도판서) 3대가 크게 현달해 기계유씨는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 승계(承桂)가 아들 천경(千慶, 전서), 성리(成利, 군기시사), 성보(成保, 부정), 성복(成福, 판사재감사) 등 4형제를 둬 번창했으나 마침내 고려가 망했다.
조선 초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두각을 나타낸 이는 성리(成利 군기시사)의 손자 유효통(孝通)이다.
그는 정인지와 같이 중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종시대 집현전의 제학(提學, 종2품)이 됐으며 노중례와 함께 ‘향약채집월령’ 등을 약술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약용식물을 맨 처음 정리한 의서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장자 목로(牧老)의 부인이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 황보인의 딸인 관계로 황보인이 수양대군당에 의해 참변을 당한 뒤 유효통(孝通)일가도 박해를 받았다.
이때 사육신이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는 우리나라 역사상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 평안도 절제사(節制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궁중을 숙위하던 중추원의 종2품)가 됐다. 세조를 제거하고 억울하게 쫓겨난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운동을 벌이다 발각돼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세조초에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해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인 부제학(副提學)에 이른 학촌 유진(鎭)은 역학에 정통했다.
또 유호인(好仁)은 성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堂,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에 뽑혀 관이 홍문관의 5품 벼슬인 교리(校理), 백관을 규찰·탄핵하던 사헌부의 정4품 장령(掌令, 대검찰청 부장검사)에 이르렀다.
그는 점필재(김종직)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고, 시문에 능했으며 명필로도 이름을 떨쳤다. 더욱이 효성이 극진했다.
성복(成福)의 손자요, 유효통(孝通)의 재종제인 유해(解)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동서 간이다. 그는 일찍이 세종때 진사(進士)에 급제했으나 24세에 조졸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기계유씨(杞溪兪氏)를 명문청족으로 발전시킨 것은 사실상 유해(解)의 자손들이었다.
그의 아들 유기창(起昌)은 성삼문과 이종 4촌인 관계로 화가 인척에 미처, 젊어서는 이리저리 도피생활을 하다가 성종 때 무과에 급제 여러 지방관을 거쳐 첨지중추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산조말 왕의 난폭한 정치를 극간하다가 죽은 영의정 성준의 친당으로 몰려 거제도에 유배됐다. 중중반정 후 조정에서 병조참의를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향리 비인으로 돌아가 생을 마치니 세상에서 연산 때의 4절신이라 일컬었다.
후에 충청도 유림이 중심이 돼 비인에 청절사를 창건하고 유기창(起昌)과 그이 아들 정당 유여림(汝霖)을 같이 배향해 그 청덕을 추모했다.
정당 유여림(汝霖)은 그의 아우 유여주(汝舟)와 더불어 중종때 이름난 명신이요 명사였다. 정당 유여림(汝霖)은 연산군때 문과(文科)에 급제, 중종반정 후 벼슬길에 나서 사간이 됐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가 일어났다.
그는 심연원 등과 함께 조정암(조광조)과 더불어 같이 처벌해 줄 것을 계하다 파직됐다.
그 후 형조판서(判書, 정2품 법무장관)가 되었을 때 김안로의 죄를 논핵하다 도리어 파직돼 향리로 추방되었다. 7년 후에 그는 다시 기용돼 예조판서(判書, 정2품 장관)가 됐으나 얼마 안돼 별세했다.
정당 유여림(汝霖)은 천성이 담박하고 부귀영화를 꺼려 7년간의 은둔 생활을 할 때도 평범한 촌노와 같았다 한다.
정당 유여림(汝霖)의 아우 유여주(汝舟)는 중종때 조정암(광조)이 주장해 설치한 현량과(賢良科, 조선 중종 때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게 해 대책만으로 시험한 제도)에 선발됐으나 기묘사화 후 향리인 비인으로 낙향해 다시는 나오지 아니했다.
유여주(汝舟)는 아호를 선취처사 또는 임벽당(林碧堂)이라 했다.
그의 부인 김씨는 남편의 아호가 임벽당(林碧堂)인 연유로 임벽당김씨(林碧堂金氏)라 하는데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조 3대 명원시인으로 일컬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