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조시대는 기계유씨 황금시대

유계(棨)는 신독재 김집의 문인(門人)으로 호는 시남(市南)이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등과 더불어 충청도 산림오현이라 일컫는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임천에 유배되고 효종초에 인조의 시호문제로 종성에 유배됐다. 방면 후 학문과 저술에 전심하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가 효종의 북벌계획에 적극 참여했다. 현종 초 예론시비에는 송시열과 동조했다.

유계(棨)는 도덕, 절의, 학문 문장에 있어 추앙을 받았다.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고 전국 여러 서원에 배향됐다. 저서에 강거문답, 가례원류, 여사제강, 시남집 등이 있다. 숙종조에서는 유헌(櫶, 종2품 참판), 유명일(命一, 문과를 거쳐 종2품 부윤), 유하익(夏益, 예조판서), 유하겸(夏謙, 문과에 급제 정3품 승지), 유명웅(命雄, 의정부의 정2품 좌참찬), 유명홍(命弘, 예조판서), 유명응(命凝, 종2품 경상도관찰사) 등이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기계인(杞溪人)의 명성을 더 한층 빛낸 시대는 영조시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유척기(拓基, 문익공 영의정)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해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내 영조 15년에 우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에 이르러 영조 중흥사업의 주역이 됐으며 30년간 노론(老論) 집권당의 영수(領袖, 우두머리)로 임했기 때문이다.
유척기(拓基)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질 유언호(彦鎬 忠文公, 좌의정), 서(壻) 윤시동(우의정), 조동회(이조판서) 등을 통해 정조시대 노론 청류파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척기(拓基)의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다.

영조시대 유척기(兪拓基)와 쌍벽을 이룬 유최기(兪最基)는 그의 종형(宗兄)이다. 유최기(兪最基)도 일찍이 문과에 급제해 관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이 깊고 시문에 능해 영조가 항상 유신으로 대우했다.
또 영조시대에는 기계문중에 많은 인물들이 배출돼 유건기(健基, 참판), 유우기(宇基, 승지), 유언술(彦述, 대사헌), 유언국(彦國, 참판), 유언민(彦民, 대사헌), 유한소(漢蕭, 함경도관찰사) 등이 크게 활약했는데 특히 유언술(彦述)은 시문과 직간으로 이름을 떨쳤다.

영조시대에 이어 정조시대에도 기계유씨(杞溪兪氏)의 황금시대는 계속됐다. 정조시대 노론 청류파를 주도했던 유언호(彦鎬, 충문공 좌의정)을 비롯해서 유한모(漢謨, 형조판서), 유악주(岳柱, 대사간), 유한인(漢人, 장령), 유한령(漢寧, 예조참의) 등이 활약했고 한편 학계에서는 대재 유언집(彦鏶, 이조참의), 저암 유한준(漢雋, 형조참의)이 크게 이름을 떨쳤다.

특히 유언호(彦鎬, 충문공 좌의정)는 호당에 뽑힌 준재일 뿐 아니라 백부 유최기(最基), 당숙 유척기(拓基)의 후광을 이어받아 정조 초 새로 설치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규장각의 직제학으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또 그는 개성유수로 자원해 가서 곤궁에 빠진 연암 박지원을 구해준 일도 있다. 그는 정조의 문화정치에 큰 공을 세워 정조묘정에 배향됐다.

그러나 순조 조에서 조선조말까지 왕권은 쇠퇴해 지고 대신 외척세도정치가 등장해 나라의 형편은 기울어 갔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해 가며 유장환(예조판서), 유치숭(형조판서), 유진오(兪鎭五, 좌찬성), 유성환(판서), 유치선(공조판서) 등을 비롯해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서 조선조 명문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에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조선조에서 문과(文科, 대과) 98인, 상신(相臣, 정1품 정승) 3인, 판서(判書, 정2품 장관) 12인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계유씨(杞溪兪氏)는 학문에서 더욱 그 빛을 발휘해 조선중기 이후 혁혁한 연원을 계승하고 있다.

시남 유계(兪棨)를 비롯해 자교당 유명뢰(慈敎堂 命賚), 겸산 유숙기(兼山 肅基), 대재 유언집(彦鏶, 이조참의), 저암 유한준(漢雋, 형조참의), 봉서 유신환(鳳捿 莘煥) 등은 조선중기 이후 국학과 후진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시남 유계(兪棨)는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門人)이나, 율곡이 학문을 추앙해 독특한 학풍을 확립했고, 유명뢰(命賚)는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겸산은 삼연의 문하에서, 유언집(彦鏶)은 도암의 문하에서, 유한준(漢雋)은 뢰연 지암의 문하에서, 유신환(莘煥)은 노주의 문하에서, 각각 학문을 닦아 대성한 학자들이다.

또 서화에 있어서도 유한지(綺園 漢芝), 유치봉(霞山 致鳳), 유창환(愚堂 昌煥), 유진찬(蒼史 鎭贊) 등이 각각 독자적인 개성의 세계를 이뤘다. 유한지(兪漢芝)는 전(篆), 예(隸)에 능했으며 유치봉(霞山 致鳳)은 산수에, 유진찬(蒼史 鎭贊)은 매화에 능했다.
시대가 변천하면서 구체제를 부정하고 우리나라에 신지식과 개화사상을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이는 유길준(矩堂 吉濬)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의 유학생이며 한국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해 현대문으로 서유견문을 저술했다. 또 내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나 12년의 망명에서 귀국해서는 교육과 계몽사업에 전념했다. 저서에 ‘서유견문’, ‘유길준전서(兪吉濬傳書)’가 있다.

그밖에 유기환(외무대신 箕煥), 유성준(내무협판) 등이 한말의 인물로 꼽히고 있다.
일제시대에서 해방초에 걸쳐 유진태(조선일보사장, 조선교육협회장), 유정근(임정요인, 15년 복역후 옥사), 유일준(의학박사, 경의전교수), 유만겸(충북지사, 경학원부제학), 유억겸(연대총장, 문교부장) 등이 크게 활약했다. 특히 유진태와 유정근은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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