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건축물을 따라 나선 강경여행

근대건축물을 찾아 나선 강경여행의 첫 여정을 나바위성당(사적 제318호)에 풀었다. 나바위성당은 행정구역상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속해 있지만 강경에서 2㎞ 정도만 달려오면 만날 수 있는 곳이라 강경 당일치기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강경에 왔다 이곳을 빼놓고 가면 두고두고 후회할 정도로 큰 의미를 담은 유적이기도 하다.

강경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조금 내달리면 금방 나바위성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나오는 데 이 표지판을 끼고 우측길로 접어들면 나즈막한 화산(華山)에 걸터앉은 성당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뱃길에 오른 지 42일 만에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서해안을 타고 북상하다 바닷물때를 맞춰 금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왜 이곳이었을까. '천주교박해'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당시, 강경포구는 평양장, 대구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이었고 원산포와 함께 2대 포구로 꼽히던 곳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당연히 포졸들이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천주교에서 나바위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첫 선교지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또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함께 간직하고 있다. 서구와 한국의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된 성당 때문이다.

나바위성당은 1897년 초대주임이었던 베르모넬 신부가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기념해 세웠다. 이후 1906년부터 이듬해까지 현재의 성당건물을 지었고 10년 뒤인 1916년 다시 흙벽을 허물어 벽돌을 쌓고 성당 입구에도 고딕양식의 종탑을 세웠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아넬 신부가 밑그림을 그렸고 중국인 인부들이 성당공사를 맡았다. 성당의 기초를 닦고 성당 골조를 이룰 나무를 금강을 가로질러 옮기는 일은 한국인 신자들의 몫이었다. 전통 한옥 지붕양식과 고딕식 첨탑, 팔각형 창틀이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미학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우선 입구에서만 보면 나바위성당은 전형적인 서구식 교회 모습이다. 고딕식 종탑 때문이다. 그런데 정문을 돌아 측면으로 돌아서면 상황이 급반전된다. 붉은 벽돌과 아치형 창틀로 꾸며진 벽체 위로 한국의 전통미가 살아 숨쉬는 한옥 기와지붕이 얹혀 있고 그 위로 중국식 팔각 채광창과 함께 기와지붕이 한 층 더 올라서 있다.

성당 내부는 숨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이곳은 사람의 공간이 아니라 신의 공간이라는 점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숙연해진다. 밖에서 보았던 아치형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심상찮다. 성당하면 떠오르는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한 빛이 아니라 그윽하게 스며드는 은은한 빛이다. 채색 수묵의 그림을 담은 한지를 창에 바른 탓이다. 송현섭(베드로) 신부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매력적인 성당에 어울리는 기발한 발상이다.

성당의 독특한 매력을 뒤로 하고 화산 정상에 닿는 숲길을 따라 걷는다. 김대건 신부 순교비와 망금정(望錦亭)을 만난다. 망금정은 1915년 베르모렐 신부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피정(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묵상 등을 통해 수련하는 일)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 서서 시원하게 뻗은 금강을 바라보면 벅찬 감흥과 함께 이내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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