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감나는 역사, 응답하라 백제



지역의 역사와 색깔을 나타내는 것 중 현재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전통이 깊은 지역축제이다. 전국적으로 지역마다 각자의 색깔을 표현하며 축제를 선보이고 있소 이를 통해 관광산업을 극대화시키려 하는 작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충남지역 역시 지역축제를 통해 충남만의 색깔을 표현하려 하고 있다. 많은 축제 중에서 충남을 대표할 수 있는 축제는 무엇이 있고 유래 등은 어떻게 됐는지 살펴본다.
◆백제대제에서 백제문화제로
충남은 백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백제가 위례성에 첫 도읍으로 정했을 당시는 기간이 짧아 백제가 충남이고 충남이 곧 백제였다.
백제는 그만큼 오랜 기간 충남에서 많은 역사를 써내려갔고 충남에서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 때문에 충남을 대표하는 축제라하면 백제문화제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백제문화제의 출범은 지난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백제대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것이 백제문화제의 시초이다.
당시 부여에서는 백제 후기의 3충신인 성충과 흥수, 계백을 모시는 사당을 창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본래 3인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홍가신(洪可臣)이 선조 8년인 1575년에 창선한 의열사에 모셔져 있었다.
의열사 창건 당시에는 3충신 외에도 여말 부여에 은거했던 문신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봉안돼 있었고 후에 조선시대의 선비였던 정택뢰(鄭澤雷)와 황일호(黃一皓)가 추가로 배향됐다.
그런데 한국전쟁 후에 백제의 3충신만을 따로 모시는 사당을 부소산성 내 건립하자는 의견이 돌았고 그 연장 선상에서 대제(大祭)룰 지내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5년 2월 백제대제 집행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이듬해 4월 19일 의열사에 모셔진 위패를 현 삼충사의 터에 설치된 임시제단에 모시고 삼충제가 거행됐고 이튿날에는 전국농악대회와 궁술대회, 21일에는 그네뛰기 대회, 22일에는 낙화암 아래 백마강에서 2만여 명이 군중이 모인 가운데 삼천궁녀 위령제가 수륙재 방식의 거행됐다. 처음으로 열린 백제대제는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1956년 삼충사가 완공됐고 1957년 3회 대회부터 의열사에서 위패를 봉안해 오는 절차가 생략됐다. 그리고 백제 역사 678년 간 31대 왕에 대한 제향이 아니라는 의견에 따라 행사의 명칭을 백제제로 변경됐다. 이때까지 축제는 지역민들의 찬조금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4회 때 이르자 문제가 생겼다. 찬조금의 액수가 급격하게 줄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삼충제를 제외한 나머지 행사가 중단됐다.
다음 행사 때에도 같은 이유로 행사가 하루만에 끝났다. 5회 때 축제의 관중은 1000여 명에 불과했다. 1960년과 이듬해에는 4·19혁명과 5·16 쿠데타로 인해 규모는 더욱 축소됐다.
이듬해인 1962년 백제문화제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백제충렬제'로 이름이 바뀌었고 3공화국 정부의 관심 속에 부여군에서 예산 수립과 집행을 전담하면거 대규모의 행사추진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행사에 참여한 인원은 5만 명에 달하는 등 성황을 이뤘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백제문회제는 제의를 중심으로 한 부대행사로 문화예술행사를 거행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질 못 했다.
본격적인 변화는 1965년부터 일어났다. 대통령과 3부의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충남도에서 백제문화제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진행했고 해당 이름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면서 10만 명이 이곳을 찾았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66년에는 공주시(당시 공주군)가 참여키로 결정했다 1971년에는 공주 무령왕릉 발굴 등의 겹경사를 맞기도 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는 도청이 위치한 대전에서 열리기도 했다. 지난 2007년부터눈 공주와 부여가 통합개최하면서 백제문화제 추진위원회가 공식 발족했다.
백제문화제가 전국적인 행사로 이름을 날렸지만 여전히 콘텐츠의 부족이라는 비판에선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3인의 충신에 대한 제향을 목적으로 시작된 백제문화제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콘텐츠의 부재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늘 들어야 했다. 그 때문에 추진위는 항상 콘텐츠를 개발하려 했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진 1965년부터 콘텐츠의 다양성이 시작됐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역사 또는 민속축제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했고 백제문화제는 이들과 다른 차별성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직면하게 됐다.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키 위해 지난 2010년 9월 18일부터 19월 17일까지 열린 ‘2010 세계대백제전’이었다. 총 관람객 260만 명을 목표로 국비 30억 원을 포함해 모두 24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당시 새롭게 선보인 프로그램으로 공주 고마나루와 부여 낙화암에서 열린 ‘사마이야기’와 ‘사비미르’ 등의 공연이었다.
전자는 무령왕의 일대기를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백제금동대향로 등 백제의 문화유산을 이미지화한 작품이었다.
이 외에도 공주 성안마을과 부여 백재문화단지의 왕궁에서 ‘웅진성과 사비궁의 하루’라는 이름으로 공연 및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됐고 ‘퍼레이드 교류왕국 대백제’ 등의 퍼레이드 행사도 진행됐다. 소실된 백제유물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 ‘백제유물유적 복원전’도 열렸다. 총 22개의 대형프로그램과 70개의 시·군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대백제전의 이 같은 시도는 기본적으로 거대 규모의 프로그램을 통해 백제문화제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제고시켰다. 하지만 도와 공주시, 부여군의 재정 여건이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지속적인 예산 투입은 불가했다.
실제로 이듬해부터 난관에 봉착했고 최근 전국적으로 축제 과잉이라는 논란이 증폭되고 있어 어려움은 꾸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남의 역사적 뿌리라 할 수 있는 백제를 주제로 삼는 백제문화제 또한 그 비판에서 자유롭진 못 했다. 성공과 좌절을 계속해서 겪은 백제문화제였다.

공주와 부여, 전북 익산의 걸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백제문화제에 대한 관심은 전보다 더 커졌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경우 인근을 찾는 관광객이 전보다 배 이상 많아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자연스레 관심은 백제문화제로 쏠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경주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예전보다 3배 가까운 관광객이 늘은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백제문화제 역시 내년도 축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알차게 준비 중이긴 하지만 여전히 잡음은 많은 상황이다.
우선 전북 익산에서 개최하다 명맥이 잠시 끊겼던 서동축제가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부활하면서 백제문화제와 겹칠 우려가 생겼고 공주와 부여가 공동으로 개최하던 백제문화제를 격년으로 따로 개최한다는 여론에 부딪힌 것이다.
도가 매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동시에 개최해 온 백제문화제를 격년제, 즉 한 시·군에서 번갈아가며 개최하는 것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를 통해 불필요한 프로그램의 축소 등 예산낭비 요소를 차단하는 대신 특정 주기에는 도비 지원액을 대폭 늘려 행사의 규모를 키우겠다는 복안이지만 양 시·군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여기에 안희정 충남지사는 백제문화제가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자립이 필요하다며 재정적 지원을 늘리지 않겠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백제문화제가 진정한 세계적인 축제로 성장시키기 위한 방편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공주시와 부여군은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백제문화제는 여전히 날로 성장해 가고 있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