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온 돈의 횡포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 미국의 저널리스트 DW 깁슨의 저서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의 한국판 표지.

‘도심의 한적했던 동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낡은 집들을 허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멋진 상점과 카페들이 연이어 들어선다. 집값과 임대료가 훌쩍 뛰어오른다. 옛날부터 그 동네에 살아왔던 사람들, 오래된 가게들이 밀려난다.’

최근 권선택 대전시장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문제가 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을 시 간부들에게 주문한 바 있다. <본보 2월 12일자 9면 등 보도 - "원도심 문화예술 공간 지켜야">

젠트리피케이션은 원도심 활성화로 임대료가 급등하면서 원주민이 다른 지역으로 내몰리는 사회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권 시장은 지난 11일 주재한 긴급간부회의에서 원도심 소재 문화카페 등이 건물 재건축으로 둥지를 잃어가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면서 “임대료 문제를 민간영역이란 이유로 방치하지 말고 임차인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라며 “원도심에서 활동하던 문화예술인 이탈을 막을 수 있는 ‘쉐어하우스’ 같은 공간공유정책을 시가 직접 나서서 강구하라”고 지시했고, 대전문화연대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집담회(集談會)를 갖기도 했다.

◆못 가진 자들의 몰락
젠트리피케이션은 ‘토지를 소유한 상류층’이라는 뜻의 단어 ‘젠트리(Gentry)’에 어원을 둔 말로, 중상류층이 도심 주거지로 들어옴에 따라 주거비용이 상승하고 이에 비싼 월세 등을 감당할 수 없는 원주민들이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일컫는다.

이 용어를 맨 처음 사용한 인물은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라스다. 그는 1964년의 런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런던에 거주하는 노동자계급은 상하위 중산계급에게 차례차례 침략당한다. 마구간을 개조해 만든 허름하고 그저 그런 집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다시 주인 손으로 돌아가 고급스럽고 비싼 주택으로 거듭난다. 어떤 지역에서 이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이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확산되며, 결국 기존 노동자계급 주민들은 거의 다 집에서 쫓겨나고 그 지역의 색채 또한 완전히 바뀌고 만다.’

원도심 상권의 임대료 상승과 건물 철거 흐름에 밀려 존폐 기로에 서 있는 대전 중구 대흥동의 문화카페 ‘도시여행자’. 사진 출처-대전스토리 블로그(http://daejeonstory.com/6900).
◆자본과 권력의 횡포
미국의 저널리스트 DW 깁슨의 저서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은 수십 년 전에 뉴욕에서 나타난 현상을 토대로 그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무대는 뉴욕 중에서도 맨해튼 일부 지역과 브루클린이다.

20여년 전 만해도 소득이 낮은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의 주거지였지만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주민들은 내쫓기듯 밀려나고 만다. 겉으로 볼 때 동네는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하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쫓아내고 쫓겨나는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낙후된 지역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구색을 벗지만 원주민들로선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한가운데는 자본과 권력의 횡포가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개발 일변도와 재산가치 극대화는 도심의 건강성을 해치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가 인터뷰한 대상은 부동산업자, 건물주, 세입자, 전 은행장, 거리예술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으로, 이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이 남기는 어두운 이면을 들려준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단순히 상가 임대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웃들이 바뀌어가면서 인간관계가 빠르게 단절되고, 지역사회의 문화와 공동체의 유대는 허무하게 사라진다.

◆답은 ‘사람’에게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한국 사회에서도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요즘 ‘뜨는 동네’들은 뉴욕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복제라도 하듯 쏙 닮아 있다. 20여년 전에 지구 저편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개발 일변도로 치달아왔던 우리나라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자본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임을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자본주의는 동정심이 부족해요. 오로지 탐욕뿐이죠.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역사회를 배제하지 않고, 지역민들을 참여시키는 방법으로도 도시는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최 일 기자 choil@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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