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표현 중의 하나가 ‘퍼주기’이다. 참 자극적인 말이다. ‘퍼주기’란 말을 들으면 왠지 ‘소용없는 짓’ ‘공연한 짓’ 등의 어감이 느껴진다. ‘퍼주기’ 또는 ‘퍼주기식’이란 표현은 복지정책 또는 대북정책 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때 자주 등장한다.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사용이 시작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눔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때 빠지지 않는 표현이다.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겐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는 말로 들린다.
세상에 가난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이 신나고 즐겁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생존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이 ‘퍼주기’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일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당사자의 기분을 헤아려 봤다면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다. ‘퍼주기’란 내가 쓸 것조차 괘념치 않고 조건 없이 마구 주는 모양새를 표현한 것이지만 실상 우리의 나눔 문화는 아직 내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줄 만큼 성숙돼 있지 못하다.
그런데도 ‘퍼주기’라는 표현은 참으로 자주, 널리 사용되고 있다. ‘퍼주기’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나누고 베푸는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받는 자가 도움을 활용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훗날 자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구조에 합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도움을 받는 이는 늘 무기력하고 습관화돼 있을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입장으로 선회할 수 없는 부류라는 강한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함부로 써서는 안 될 표현이다.
‘세상에 일방적인 퍼주기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맹자가 주장했듯이 인간은 누구나 측은지심(仁), 수오지심(義), 사양지심(禮), 시비지심(智)을 갖고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 고마움을 알게 되고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마련이다. ‘퍼주기’라는 표현은 이 같은 원리를 부정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 도움을 받는 이들은 파렴치해서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매너리즘에 빠져 자활의지를 갖지 못하고 언제나 남의 힘에 기대기만 하려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정부가 행하는 최소한의 통제조차 부정하면서 철저한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가 만연하며 승자독식의 문화는 점차 뿌리 깊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 낙오자는 구제불능이고 세상은 경쟁에서 살아난 이들만의 축제라는 생각에 기반을 둔다. 나누고 베풀어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도움을 받고 성장한 이들이 훗날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변모하는 선순환의 구도를 부정한다.
불과 60년 전 우리도 ‘원조’라는 형태의 도움을 통해 생존했고, 이제는 당당히 세계 속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당시 우리를 도왔던 이들이 ‘퍼주기’는 안 된다며 원조를 거부했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 자명하다. 나누고 베푸는 데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경제규모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복지정책이나 대북정책의 수행을 ‘퍼주기’라고 인식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유교문화의 강한 잔재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오직 자식에게만 부와 명예를 물려주고자 하는 강한 집착을 갖는다. 혈연주의가 지나치게 강하다 보니 내 가족이나 혈연 범주를 벗어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누는 일에 몹시도 인색하다. 세상에 일방적 ‘퍼주기’는 없다. 우리도 이제 베풀고 살 때가 됐다. 내 것을 충분히 채우고 난 후에 나누고 베푼다고 생각하면 그 시점은 기약이 없다.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받은 사람은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된다. ‘퍼주기’라는 자극적 표현의 사용은 자중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