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우리는 찬연한 고대문화를 자랑한다. 대륙의 중원을 호령한 고구려의 기상이 자랑스럽고 해상왕국을 실현한 백제의 문명이 자랑스럽다. 불국정토를 꿈꾸던 신라 1천 년의 역사도 우리가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이루어낸 중세의 문화도 많은 침탈을 당하고 국권을 잃는 치욕이 있었지만 나름 자주적이고 독특한 문화 강국으로 성장하고 발전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대사가 찬란한 문화국가임을 자랑으로 내세운다. 고대사가 초라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일본을 무시하는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중세까지도 우리의 문화나 경제 및 사회의 발전은 일본이 넘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근현대로 접어들면 우리는 한 없이 초라해진다. 특히 근현대사를 지극히 자랑으로 여기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인이 갖는 근현대사에 대한 의식은 초라하다 못해 부끄러움으로 가득하다. 조선 말기의 세도정치로 시작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하루하루를 보낸 구한말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감추고 싶어 하는 흔적이다. 국권을 빼앗기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통치를 당한 시간은 더할 나위가 없이 우리가 5천 년 역사를 통해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시간이다. 현대사로 접어들면서도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는 계속됐다. 그 첫째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들이 이 사회의 지배층으로 그대로 군림하게 된 점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후유증은 의외로 컸다. 불의가 용납되는 사회가 됐고 불공정이 만연한 사회가 됐다는 점이 가장 큰 후유증이다. 그 여파로 부정한 집단이 권력을 잡아 득세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이어갔다. 사회 구석구석에 친일파의 자손들이 특권층으로 합류해 있고 그들은 오랜 세월 특권 속에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불과 50년 이란 짧은 시간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고는 하지만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정과 부조리가 여전하다.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한 이 나라는 권력형 비리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이 건국한 이래 권력이 저지른 부조리는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최고의 권력이라는 대통령도 재임한 11명 모두가 비리에 휩싸여 불행을 자초했다. 대통령과 관련된 주변 인물들의 비리 사건이 단 한 번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다. 임기를 마치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으며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전직 대통령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현대사가 얼마나 불행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불행한 말년을 보내고 있거나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앞선 이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경계심을 가질 만도 하건만 주변인들에 의한 권력형 비리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다. 이처럼 불행한 현대사를 가진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아직 임기를 15개월이나 남긴 현직 대통령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비리 사건은 상상을 초월하는 메가톤급이다. 처음 관련 보도를 접했을 때는 “설마”를 외쳤던 다수의 국민들은 고구마 줄기처럼 캐면 캘수록 나오는 비리 정황을 보고 탄식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던 맹렬 지지자들도 등을 돌려 여과 없이 비리와 연관된 대통령을 향해 비아냥거림을 쏟아내고 있다. 지금의 상황대로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역대 가장 불행하고 불명예스러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훗날 어찌 낯을 들고 대한민국 땅에서 살 수 있을지 염려스러울 지경이다.

현직 대통령의 초대형 비리사건을 접한 국민들은 정신적 공황을 맞고 있다. 멘탈(mental)이 붕괴됐다는 신조어인 ‘멘붕’이란 낱말이야말로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다. 아직은 수사가 진행 중이니 뭐라 단정적으로 말할 시점은 아니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이번 비리 사건은 온 국민을 바보로 만든 사악함의 극치이다. 이토록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국민의 도리를 다하는 국민을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다. 계속되는 황당한 권력유착형 비리에 착한 국민들은 의욕을 잃는다. 대한민국의 불행한 근현대사는 언제쯤 종말을 맞으려나 심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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