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수십 년 동안 ‘그깟 영어와 수학이 뭐라고 그걸 가지고 아이들의 인생을 가르마 타서 삶의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나’라는 불만을 품어왔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인재의 개념이 무척 잘못됐다는 생각도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영어와 수학이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이유가 없다는 나름의 생각은 더욱 공고해졌다. 실제 생활에서 그다지 효용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그 두 과목만 대입 시험에서 지극히 어렵게 출제돼 변별력을 가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다.

역사, 철학, 문학, 예술 등은 인간의 삶을 윤나게 하는 너무도 소중한 학문 분야이다. 하지만 영어와 수학의 그늘에 가려 초중고 시절 그저 맛만 보는 과목들이다. 감수성이 최고조에 달하는 어린 학생들이 인생의 진선미를 깨달을 겨를을 주지 않고 입시를 위한 영어와 수학의 공세는 지속된다. 효용 가치가 지극히 낮은 영어와 수학을 왜 중요과목으로 지정해 아이들의 혼을 빼놓는지 정말 이해를 못 하겠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다른 기성인들도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와중에 정부가 나서 인성교육과 인권교육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다행스럽다. 각 시도교육청도 인성교육과 인권교육에 관심을 보이며 정부 시책에 발맞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영어와 수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인성이나 인권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마음가짐과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 곧 인성교육이고 인권교육 아니겠는가. 왜 진작 이런 좋은 교육을 확대하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느껴질 따름이다.

언뜻 들으면 인성과 인권은 비슷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상은 대조적인 부분이 있다. 바른 삶을 지향한다는 점은 공통점일 수 있으나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인간으로 육성하는 데 방점을 두느냐 또는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인간으로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느냐의 관점 차이가 발생한다.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등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는 대한민국은 어른이나 상사에게 조건 없이 순응하는 자만이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다는 신념이 국민적 정서에 깔려 있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조차 양보하고 물러서며 참고 기다리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어린 사람, 약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말하고 주장하는 것을 다소 불경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늘 강한 자, 다수인 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사회를 유지해왔다. 영어와 수학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업을 가져 남을 억누르고 지배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라고 가르치는 가운데 인성교육은 늘 뒷전이었다. 성공과 출세만 주문했다.

인격적으로 바른 품성을 길러준다는 인성교육은 참으로 필요하다. 복잡한 이 사회를 화합하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조화로운 인간,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는 이타적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인성교육이 강한 자에게 순응하고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인간이 성공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라고 가르치는 데 방향이 맞춰졌다면 당장 접어야 한다. 무조건적 복종이 인성 바른 삶이라고 가르친다면 세계무대에서 결코 통용될 수 없는 후진적 인간을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

인권교육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배려하고 양보하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임을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인권교육이다. 인권교육은 소수의 무리, 힘없고 약한 자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사고의 틀을 만들어 주는 데 전력해야 한다. 자신의 권리를 찾는 일이 약자를 보살피고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보다 우선시될 수 없음을 똑똑히 가르쳐야 한다. 인성교육도 인권교육도 균형감 있는, 바른 품성의 인간을 기르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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