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세상 살며 겪는 갖가지 어려움은 혼자서 끙끙거리기보다 전문가의 조언을 받으면 한결 용이하게 극복할 수 있다. 그러니 도움을 받는 것이 옳다.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느끼면 살아가고 있지만 늘 고독하고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전문 상담사도 계속 늘어가는 것 같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복잡하고 힘든 일이 있어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센터에 상담을 신청했다. 접수 후 며칠이 지나서 나의 상담을 맡을 전문가가 배정됐다. 그가 관련 분야 전문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큰 기대감이 몰려왔다. 하루 빨리 정신적 안정을 찾고 싶어 상담에 성실히 임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상담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그 상담사의 연락처는 공개되지 않았고, 오로지 그가 출근하는 날 유선전화로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와 접촉할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불편은 시작됐다. 뭔가 바로바로 속 시원한 대화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됐다. 특정 요일, 특정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 외에 그와 통화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원하는 때에 상담사와 바로 연락하지 못하는 상황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어렵게 전화가 연결되더라도 서로 일정을 조율해 만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자원봉사자인 그는 특정 요일, 특정 시간에만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일정을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게 시간을 맞춰 상담 일정에 착수했다. 난 그 간의 울분과 억울함을 맘껏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는 내가 몇 마디 하면 내 말을 끊었다. 그러면서 계속 나를 훈계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후 몇 번의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태도는 일관됐다. 결국 나는 상담을 통해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됐고 결국 상담 포기를 선언하고 말았다.

가깝게 지내는 한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도 똑 같은 경험을 했다. 내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기도 전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책임 소재를 밝히려 했다. 교통사고 조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과실이 각각 몇 %인지를 밝혀내려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니 오히려 울화가 더 치밀었다.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내편이 돼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이해해주고 위로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앞서 만났던 상담사와 마찬가지로 나를 위로해 줄 생각은 없고 오로지 심판 볼 궁리만 했다. 버럭 화를 내고 그 친구와의 대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친구는 달랐다. 그는 대화하며 간간히 내게 술을 따라주었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빛 교환을 하며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중간 중간에 “힘들었겠구나.”, “화날 만 하네.”, “나 같아도 힘들었겠다.” 등등의 추임새를 넣어가며 내가 하는 말에 적극 호응해 주었다. 그 친구에게 내 마음 깊은 응어리를 쏟아내고 나니 기분이 풀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풀리고 나니 친구는 그 제서야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내 귀에 그 말이 들어왔다.

분명 그 친구는 상담을 전공한 전문가도 아니고, 나보다 월등히 사회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닌 평범한 내 또래이다. 하지만 그의 대화법은 전문 상담사를 뛰어넘는 아주 탁월한 수준이었다. 그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우선은 대화에 있어 듣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상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난 뒤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네면 상대는 저항 없이 그 이야기를 수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상담은 처음부터 정해진 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속이 후련하도록 충분히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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