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권에서 왕조가 바뀌면 국호를 바꾸고 풍수에 의한 국가의 수도를 천도할 때에는 지리(地理)와 산수(山水)를 살펴 도읍을 정했다. 고려의 왕건에 의한 송악산과 조선 초 이성계에 의한 계룡산과 북한산 도읍의 터 잡기는 새로운 국가의 시작에는 매우 중요한 결정 사안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도읍지를 찾고자 했다. 풍수전문가인 권중화로부터 태(胎)를 봉안할 자리로 현재의 금산 추부지역에 태실을 안장하고 도읍지로 계룡산 신도안을 건의 받았다. 태조는 친히 왕사인 무학대사와 조정의 중신들을 대동하고 지세를 살핀 후 명당임을 확인하고 공사를 착공했다. 당시에 종로, 남문, 북문, 동문, 서문, 하천 토목 작업 등 1년 간 공사 진행과정에서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진언에 의해 공사가 중단되고 한양이 새로운 도읍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신도안 도읍의 공사가 중단 사유에 결정적 역할은 하륜 등의 반대 의견은 다음과 같다. 계룡산의 위치가 한반도 남쪽에 치우쳐 동서북 삼면과 너무 떨어져 있어 도리(道理)의 균형을 얻지 못한 곳이고, 가까운 곳에 조운(漕運:물을 이용한 운송)과 용수가 불편하고 해안으로부터 멀리 있어 불편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풍수적으로 산세가 서북쪽인 건방(乾方)으로부터 오고 물은 동남쪽인 손방(巽方)으로 흘러가니 물이 빠져나가는 방향이 옳지 못해 기운을 오래 보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회룡고조(回龍顧祖:산줄기가 돌아서 본 산을 마주 바라보는 지형) 지세는 역량이 부족한 곳으로 한양과 개성에 비해 기세가 크게 떨어진다고 보았다.

이 밖에도 계룡산 도읍의 반대는 조선 개국 초기 개성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기존세력과 신흥 귀족 세력, 이방원과 하륜 등 미래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도 엿볼 수 있다. 이상하게도 오늘날 서울 수도권의 집중화와 국토균형 발전을 위한 새로운 수도를 모색함에 계룡산 일대의 신도안과 대전, 세종시를 중심으로 국민이 주인인 새 역사를 쓰고자 할 때마다 서울 수도권 수구 세력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곤 하고 있다. 이에 더 나아가 남과 북이 통일 후의 새로운 수도 입지를 거론할 때면 어김없이 지금의 서울이나 개성을 몰라도 남쪽으로 치우친 계룡산 일대는 불가함을 주장함은 6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됨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풍수를 오직 우리 인간의 생활에서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터를 고르는 것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알맞은 땅을 선정하고, 가꾸는 학문으로 이해해야 한다. 수도인 도읍터의 명당 잡기도 중요하지만, 모든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나라를 이룰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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