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5방파

(사)뿌리문화 이사장
윤창세의 장자인 설봉공 윤수(1562~1617)이다. 어려서부터 용모와 자태가 탁월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너그러웠으며, 항상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면서도 스스로의 뜻을 지켰다. 부윤 이현배(李玄培)의 딸 성주이씨와 혼인하였다. 그는 1590년 29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다.
윤황의 아들 윤순거(1596~1668)는 노종 5방파의 정신적 전통과 인물 양성에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종학당을 건립하고 서책과 기물을 마련하여 자제들을 가르쳤으며 병사종중의 규약과 기반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설봉공파는 23대 윤수(尹燧)에서부터 32대 윤상철(尹相澈)까지 10대에 걸쳐서 모두 14명의 대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문정공파>
윤창세의 둘째 아들인 문정공 윤황(1571~1639)이다. 자라서는 부친의 향학열 덕으로 서울에서 유학하면서 당대의 명유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면서 학자적 자질을 인정받았다. 특히 성혼의 사위가 되면서 그의 학통을 계승하는 수제자가 됐다.
윤문거(1606~1672)는 윤황의 넷째 아들이다. 163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636년에는 정언이 되어 청과의 화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평생 학문에만 뜻을 두었으므로, 기품과 학문과 덕이 높아 사림들의 추앙을 높이 받았다. 평상시에는 석성에 거주하다가 1672년에 병사리 재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1682년에 노강서원에 제향됐다.
윤선거(1610~1669)는 송시열·송준길과 더불어 ‘충청5현’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로, 윤황의 다섯째 아들이자 석호 윤문거의 아우이다. 20세에 이미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성리학에 힘쓰며 호서사림의 종장인 김집에게 사사하여 예론에 정통하여 성리학 전반에 걸쳐 당대의 대가가 됐다. 후에 송시열과 뜻이 맞지 않아 이로써 노소분파(老少分派)의 단초를 이뤘다.
<충헌공파>
노성 5방파의 세 번째인 충헌공 윤전(1575~1636)은 문정공 윤황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노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아버지 윤창세가 의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우다가 다음해 3월에 진중에서 사망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애통해하던 나머지 몸이 아주 쇠약해지고 눈이 나빠져 평생의 질환이 됐다. 161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저작이 되었다. 연산의 구산서원에 제향됐다.
윤원거(1601~1672)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용모가 맑고 깨끗하여 영특했다. 1625년 윤순거와 함께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글을 벗하며 청아한 일생을 보냈다.
<서윤공파>
노성 5방파의 넷째는 서윤공(庶尹公,서윤은 서울시 종4품 자치행정국장) 윤흡(尹熻,1580~1633)으로 천성이 어질고 형제들과 화목했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항상 말과 행실을 바르고 곧게 하였다. 1609년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정묘호란 때에 강화도에서 어가를 호종했다. 호란이 평정된 후에는 장수현감(종6품수령)을 역임하였다. 윤흡은 부인 남원윤씨와의 사이에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아들 윤운거(尹雲擧), 윤홍거(尹鴻擧), 윤명거(尹溟擧), 윤해거(尹海擧), 윤봉거(尹鳳擧) 가운데 특히 윤해거는 ‘노종 8거’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학문이 뛰어났다.
윤흡의 묘와 재실은 대전시 서구 괴곡동 466번지에 있다. 윤흡의 손자 윤섬이 재실을 묘앞에 세웠으며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34호로 지정됐다.
<전부공파>
윤희는 노종 5방파의 막내로 훌륭한 아버지와 형들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나, 후손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가전되는 기록이 없어 상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윤희의 아들 윤봉거는 본래 윤희의 형 윤흡의 다섯째 아들인데, 노성.상월지역에 세거하던 무안박씨와 혼인해 아들 윤개(尹揩)를 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