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역사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며 조선건국 정당성을 위해 조선 입맛대로 재해석 됐어야만 했다. ‘우왕, 신돈 아들설’을 내세워 왕조유지 핵심인 혈통을 부정하는가 하면 국가의 기본 기능인 국방력에 의문점을 내세우며 그 정당성을 깎아내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말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지 못 했다’라는 것이다. 또한 태조 이성계의 황산전투처럼 이성계의 왜구 소탕업적을 부각시키며 조선개국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14세기 고려조정은 해적 따위도 막지 못한 무능하고 부패했던 것일까? 부각되지 못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2회에 걸쳐 조명해 본다.

왜구 그림

육방론(陸防論)으로는 왜구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달은 고려는 수군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고려의 명장 최영은 군함 1000척을 만들어 육군을 태운 후 왜구를 상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최영의 주장이 다소 황망하게 들리겠지만 전문수군 양성은 단기간에는 불가능한 장기적인 프로젝트였고, 현 상황에서 당장 왜구를 막기 위해서는 고려군의 장점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이 필요했기에 최영은 이런 주장을 펼친 것이다. 우선 고려군은 활을 이용한 장거리전에 매우 능했고, 왜구는 검을 이용한 백병전에 강점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활로 백병전에 능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서는 적군보다 고지대에 위치하고 적보다 많은 수의 병사로 십자포화로 사격해야만 했다.

따라서 고려의 군함은 왜구의 함선보다 높게 만들고 크게 만들어 많은 수의 병력을 태워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재정상태가 좋지 못해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공민왕은 전문 정예수군을 양성하자는 정지의 상소를 받아들여 본격적인 수군 양성을 시작한다. 비록 고려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최영의 계획은 조선수군의 기본 틀로 수용돼 조선수군의 기본 방침이 된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최영은 조선 개국에 반대한 역적이었기에 이런 점은 부각되지 못했다.

고려 함선

 

정지의 전문수군양성계획은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은 물과 생활이 가까우니 수군에 쉽게 적응 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삼면이 바다고 대도시는 모두 큰 강 주변에 위치한 당시 고려의 환경 상을 생각한다면 백성 절반 이상이 물가에 살고만 있을 뿐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에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실제로 바다에 익숙한 직업군은 첫째로 항해를 하던 무역선원이며, 둘째로 어부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직업군에서 무역선원은 극히 적었고, 여부 또한 전체 직업군에서 5%미만으로 추정이 되며 나머지는 바다와는 무관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고려에는 우수한 수군자질을 가진 인력은 전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지는 고향인 목포·나주 일대에서 인력을 모으고 훈련을 하던 중 훈련병의 미비한 바다적응력과 새로운 분야로의 진출에서 마주하는 무지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중 식량수급의 문제가 가장 컸는데 중앙정부는 수군은 배에 타고 있기 때문에 육군에 비해 열량소모가 적다라는 판단을 해 수군에게 육군보다 적은 양의 군량미를 지급했다. 하지만 당시 수군은 육군에 비해 두 배의 열량을 소모하는 극한 군종 중 하나였다. 또한 함대 간 신호체계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종소리로 연락하려했지만 해상에서 들리지 않았고, 꽹과리와 북 또한 거리가 벌어지면 들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며 찾은 방법은 깃발을 이용한 시각적인 연락체계였고 이는 성공해 한반도 수군의 정식 신호체계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사령관에서부터 말단 병사까지 왜구에 대항한 개조한 장비 전술을 먼저 실험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지만 한 번의 패전을 기록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화약

성장을 한 정지부대는 조선건국 후 특수부대로 핵심거점인 교동·강화도에 배치되며 그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기록상에서 ‘해상에서는 육군 10명이 수군 1명을 상대하지 못 한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근접전에서는 여전히 왜구에 대항하지 못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한방이 필요했다. 이에 최무선은 당시 중국에서 개발한 화포와 화약을 국산화시키는데 성공하며 그 요구를 충족시켰다. 당시 화약제조는 국가 기밀에 준하는 중요한 기술이었기에 최무선의 화약 개발에는 중국의 심한 견제가 있었지만 최무선은 암모니아와 화약간의 밀접함 관계를 알아차리고 중국선원의 도움을 받아 화약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18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했다. 태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 이장군포, 육화, 석포, 화통, 화전, 철탄자, 오룡전, 유화 등이다. 기계가 만들어지자 사람들이 감탄하고 놀라워했다.

- 태조실록 발췌 -

하지만 명사로만 남아있고 실물이나 사용법, 그림은 없기에 그 형태와 쓰임을 알기 힘들다. 그렇지만 당시의 화약무기는 초기단계였기에 호쾌하게 배를 관통하거나 폭파시키는 무기는 드물었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가장 현실성 있는 무기는 ‘화통’ 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통은 화약으로 채운 나무통에 불을 붙여 화약에 불이 붙기 전에 적에게 투척해 피해를 입히는 원시적인 화약무기다. 하지만 당시 신관과 화약의 질이 각양각색이었기에 언제 터지는지 알 수 없었던 기술적인 문제와 흔들리는 배위에서 화통을 정확히 적군 함선에 던지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과 실력을 요구했던 무기였다. 화통이 비록 성공시키기 매우 어려운 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성공시키면 심리적 효과가 대단했을 것이다. 또한 그 파생 효과로 왜구는 아군 배에 접근하지 못해 그들의 장점인 백병전을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전술적인 효과가 대단했다.

또한 화약무기를 신호체계로 활용하기도 했다. 대포로 굉음을 만들면 전군이 그 소리에 의해 한 번에 대형을 바꾸거나 행동을 할 수 있었고, 적군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미치게 하는 등 매우 유용한 군사무기였다. 화통의 진가는 1380년 진포로 침입한 왜구 500여 척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정지의 고려군선 100척이 왜구 500척을 전부 불태웠다. 이는 왜구가 배를 정박시켜 놓고 육지로 나간 상황에서 고려 수군이 기습을 한 것이다. 빈 배를 불태운 것이지만 화통이 없었다면 단시간에 성공하기 힘들었을 법한 기습작전이었다. 이를 본 권근은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을 기리는 글을 남긴다.

최무선

공의 지략이 때맞춰 일어나니 삼십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었다. 바람 실은 전함은 나는 새가 못 따르고 진 무찌른 화차는 우레 소리가 무색하네. 화포 만든 공의 지혜 하늘이 열어주어 한번 뱃싸움에 흉한무리 쓸러냈네. 허공에 뻗친 적의 기세 연기 따라 흩어지고 세상 덮은 고명은 해와 함께 빛나도다.

-학자 권근이 최무선의 공을 축하하는 글 중-

한편 상륙한 왜구는 사상최대의 규모의 부대였다. 배가 파괴된 것을 알게 된 이들은 약탈하며 거점을 확보하고 구원부대를 기다리기로 결정했고 경상도, 전라도 일대를 약탈하며 고려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조정은 동북면의 실력자이자 자타공인 최고장수인 이성계를 투입했다. 그리고 현재 전북남원 운봉읍 일대에서 황산대첩을 벌였다.

당시 왜구는 구원부대를 기다리며 식량을 모아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는 게릴라전에 가장 적합한 곳이 지리산임을 이미 알고 있을 정도로 한국지리에 능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이는 왜구가 단순히 해적집단이 아닌 정규군에 준하는 군사조직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증거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왜구가 지리산에 입산하게 되면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황산에서 반드시 격퇴해야하는 입장이었고 결사한전을 펼진 끝에 황산대첩은 고려의 대승으로 끝이 난다.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는 많았으나 겨우 70여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왜구의 피로 7일간 물을 마실 수 없었다.

-고려사, 변안열전 중-

황산대첩비

왜구는 황산대첩 대패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3년 후 고려가 왜구에 대항해 만든 대선(大船)에 대응할 수 있을 정도의 대선 120척을 가지고 다시 침공을 시도했다. 고려의 대 왜구 전술에 대응한 대 고려 전술을 가지고 다시금 한반도를 침략한 것이다. 합포(마산)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지는 나주목포에 주둔하던 정예수군을 출동시켰다. 규모가 함선 50척에 불과했던 이유는 전염병이 의한 병력 손실이었다. 정예수군을 양성하던 정지 부대는 뱃생활을 장기간 지속하면 전염병이 돈다는 사실을 몰랐었고 이를 제때 관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소규모의 정지 부대는 섬진강 하구에 도착해 합포의 군대와 합세했으나, 왜구는 이미 남해 관음포(노량해전이 벌어진 장소)까지 진출한 상황이었다. 이에 정지부대는 왜구를 추격해 전투를 벌였고 화통을 사용해 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고려수군이 대응전술을 준비해온 수적 이점을 가진 적을 상대로 승리를 할 수 있는 역량으로 성장했음을 증명하는 전투로 정지는 ‘수많은 전투를 해왔지만 오늘같이 쾌한적은 없었다’ 라며 기록을 남겼다. 왜구의 피해는 대선 17척이 격파되고 약 2000명이 전사했는데 이 때 격파한 왜구는 핵심전력을 상실했고 이 전투를 끝으로 왜구의 대규모 침략은 사라졌다. 또한 정지는 수군의 역량이 바다를 건너 왜구 거점 중 하나인 대마도를 정벌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다.

‘우리는 활에 능하고 수전을 못하다’, ‘왜구는 수전에 강하다’

이는 환경으로 인해 만들어진 현상일 뿐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본질로 착각해 ‘우리는 활을 잘 쏘지만 수전은 못해’ 라고 단정을 지었고 계속해서 고려군이 잘하는 방식으로 왜구에 대항했다. 하지만 변화한 환경 속에서 기존의 장점은 더 이상 빛을 내지 못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초의 고통으로 돌아갔다.

만약 고려가 계속해서 ‘우리는 수전을 못 한다’, 라는 현상을 우리 속에 내재된 본질로 해석해 ‘우리는 못했기 때문에 못 한다’, 라고 단정 했다면 고려는 수군을 창설하기는커녕 왜구에 같은 방식으로 계속 당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조정과 군은 결국 변화한 환경에 발맞춰 스스로 변화해야함을 깨닫고 ‘못해도 이기기 위해서는 도전해야한다’, 라는 인식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수군을 창설해 해전으로 왜구를 완전히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자 정지와 고려수군이 증명한 교훈인 ‘현상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변화는 가능하다’다.

자기 앞에 과제가 주어진 상황에서 이를 포기하면 역사에서 사라지고, 노력해 변화하면 살아남았다. 결국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환경이 바뀌는 상황이 닥치면 환경의 변화에 맞게 적응할 줄 알아야한다. 자신 앞에 주어진 현상을 착각해 ‘우리는 이렇다’라고 현상을 본질로 해석하는 순간 그 집단은 도태됐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정지와 고려 수군은 불가능한 것을 해낸 전설의 존재가 아닌 변화한 환경에 대해 적응하고 대응해냈던 집단인 것이다.

현상은 도전의 결과지 본래 내재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 것을 깨닫지 못하는 집단이 존재하는 한편, 스스로 변화하며 환경에 맞게 현상을 주도하는 집단이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현상을 주도했던 집단이었다.

기해년(2019) 대한민국은 경인년(1350) 고려와 같이 급변한 환경 속에 던져졌다. 이것이 위기인지 기회인지도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무엇을 이뤄냈는지 알고 있다. 고려는 현상과 본질을 구별할 줄 알았고 변화에 대응해 자신의 모습을 환경에 맞춰 변화시켰던 승리했던 집단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에서는 현상을 본질로 착각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해 못 할 거야’, ‘우리가 이렇게 해도 소용없을 거야’라며 말이다.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었다면, 우리는 이 땅 위에 우리의 이름으로 서있지도 못 했을 것이다.

 

김경훈 인턴기자 admin@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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