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좋으면 부산에서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50km거리에 위치한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 한국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는 섬이다. 실제로 부산에서 뱃길로 70분이면 닿는 대마도는 한국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땅이며 역사적 기록에 따라 대마도의 본 주인은 한국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대마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에 남아있다.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 중국 역사서 진대 중-
기록에 의해면 본래 대마도는 신라인의 땅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여몽(고려·몽골)연합군이 왜를 정복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대마도를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있으며, 한국의 역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에 대한 한민족의 영유·거주 내용의 기록이 남아있다.
대마도는 곧 일본의 대마주이다 옛날에는 우리 계림에 예속되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동국여지승람 23권 중 -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어떻게 상실됐는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언제부터 왜인이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는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대마도에 한민족이 거주한 이래 본토의 국가가 대마도에 대한 관심부족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대마도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아닌 관심부재가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상실이라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관심이 있었더라면 섬으로 이주해오는 왜인을 몰아내거나 이들을 원주민과 동화시켰을 것이다. 대마도에 대한 관심부재는 조선대까지 이어져 조선왕조실록에는 대마도 영유권 주장기록이 전무하다. 심지어 태종 때 정벌 대신 귀순을 시키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조정신하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으며, 실제로 세종 때 대마도주가 ‘경상도로 복속 하겠다’라는 청을 넣었다가 거절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의 국가는 대대로 대마도에 관심이 없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대마도는 무익한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마도는 제주도의 40%의 크기를 자랑하는 큰 섬이지만 농지는 4%인 매우 척박한 땅이다. 평지가 거의 없는 산간지역으로 이뤄진 땅으로 현재도 조그만 농토조차 찾기 힘든 섬이다. 이점이 대대로 농본주의 국가였던 한반도의 국가에게 관심을 끌지 못한 결정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나 지정학적 가치는 그와 반대로 매우 이점이 있었다. 왜가 한반도와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대마도가 중간 기착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본주의를 국가경제 축으로 삼았던 한반도의 국가들은 무역에 큰 관심이 없었고 대마도는 농업과 무역 모두 할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했다. 이처럼 가난한 땅이었던 대마도는 오로지 왜구에게 노략질을 위한 중요한 거점일 뿐이었고, 대마도주는 이들의 거주를 허락하는 대신 약탈물을 세금으로 거뒀다.

왜구의 허브가 된 대마도는 고려·조선과 끊임없는 갈등을 빚었는데 외교적인 노력으로 해결한 적도 있었지만 함대를 이용해 직접 응징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고려는 창왕 1년(1389년) 2월 박위를 사령관으로 삼아 대마도를 공격하게 했다. 이 때 기록이 부족해 공격군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전함이 100척이 넘었던 것으로 봐 1만 정도의 군대가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정군은 대마도에 도착해 고려인 100여명을 구출하고 왜선 300여척과 관사, 민가를 불태우는 전과를 세운다. 이 승전으로 왜구의 기세가 꺾였지만 포괄적인 토벌이 아니었기에 완전한 근절은 이루지 못 했다. 특히, 조선 건국 후 1396년 8월 120척의 왜구 선단이 경상도를 침입해 동래 기장 동평성을 함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최고 재상 김사형을 필두로 대마도 응징을 명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전무했던 것으로 봐 별 전과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 건국된 조선은 군사개혁을 통해 육군-수군이 완전히 분리된 세계사적으로도 혁신적인 2군 체계를 만들었고, 최영과 정지의 주장을 기반으로 한 조선수군을 창설해 해안을 경비한다. 또한 차근차근 국력을 키워 세종 대에는 72곳의 수영과 829척의 병선, 5만 명의 수군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막강한 전력을 활용해 조선은 상왕(上王) 태종의 명령 하, 세종 1년 대마도를 대대적으로 공격한다. 당시 대마도 정벌의 목적은 정복전이 아닌 왜구의 본거지를 소탕해 침략을 방지하는 것으로 이종무를 삼군도체팔사로 영의정 유정현을 3군도총사로 임명했다. 정벌군의 규모는 227척의 함대, 1만 7000명의 군사였으며 이 때 군사는 모두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수군으로 65일치의 식량을 가지고 6월 19일 거제도 주원방포(周原防浦)를 출발한다.
下편에서 계속
김경훈 인턴기자 admin@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