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 1년 6월 19일, 조선군은 이종무를 삼군도체팔사로 임명해 227척의 함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수군 1만 7000명, 그리고 65일치의 식량을 가지고 대마도로 출정했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떤 근거로 대군(大軍)을 운용한 것일까? 당시 대마도 왜구들은 중국의 요동지역을 침략하기 위해 대규모 선단을 꾸려 출정했었고 그 중 몇몇 왜구가 낙오돼 조선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들을 문초한 결과 조선군은 대마도 왜구의 주력부대가 중국으로 출정한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이에 조선군은 대마도를 정벌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출정을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군대라는 것은 명령만으로 출정을 할 수 없는 집단이다. 당장 기록에만 해도 65일치의 군량미를 가지고 출정한 것은 최대 65일 간의 작전을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경제사정 상 원정군을 위한 65일 치의 군량미를 저장한다는 것은 장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대외원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군은 명나라에게 왜구의 요동 침략 정보를 알려주는 한편, 2차례에 걸친 정벌을 계획했다. 이 계획에 의하면 조선의 왜구 토벌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선 명을 침략한 왜구 주력함대가 다시 대마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해역을 통과해야함은 당연하므로 바다에서 1차로 주력함대를 격퇴하고, 2차로 대마도 본섬을 토벌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조선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명나라가 망해라는 지역에서 매복 작전으로 왜구를 격파하며 조선군은 한층 부담을 덜고 대마도 본섬을 공격할 수 있게 됐다.

조선군은 출정 전 조선에 거주 중인 내부 왜인에 대한 관리를 했다.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대마도 사신을 함길도로 유배 보냈고, 경상도에 거주 중이던 591명의 왜인을 충청과 강원도 강제 분치 시켰다. 이 때 저항하다 사망한 왜인이 136명에 이렀다고 한다. 이처럼 내외부로 철저한 준비를 한 조선군은 다음날 10척의 선발대가 대마도에 도착한다. 그리고 왜인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나 대마도주가 무응답하자 조선군은 본대를 투입해 소개 및 토벌작전을 수행한다. 114명의 적을 참수하고 21명의 포로, 1939호의 가옥과 주요항구 및 거점을 파괴하는 등 뛰어난 전공을 세운다. 당시 조선군은 상도와 하도로 분리된 대마도의 지형적인 특징을 활용해 상하도를 연결하는 좁은 길목을 막고 주요거점인 하도를 공략했는데 조선군의 공격을 예상치 못한 많은 대마도인들은 식량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산으로 도망쳐버렸다.
성공적으로 끝난 기습작전으로 인해 조선군은 대마도인들이 굶주린 채 항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전략적으로 우위에 섰다. 조선군에게는 65일치의 식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사령부에서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으니 전과 확대를 위해 군을 투입해 토벌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는 기존의 전략적 우위를 포기하는 작전으로 하부부대의 반발이 있었지만 상부는 소탕을 명령한다. 그렇게 변경된 작전에 의해 조선군은 제비뽑기로 3명의 절제사 중 한명인 박실장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그와 예속부대는 대마도인 거점을 향해 공격한다. 그러나 거점은 사람 두 명이 나란히 걷기도 불편한 좁고 긴 골목형태였고 양 옆은 70도의 가파른 경사가 있는 지형이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전투가 벌여졌다.
매복한 왜인들은 적은 수였지만 결사ㅇ전을 벌였다. 공격받은 조선군 활을 쏘기 위해 언덕으로 이동했으나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왜군은 이미 후미에서 대기 중 이었다. 이 공격으로 조선군 180여 명이 전사했고 공황에 빠진 조선군이 배로 도망쳤지만 배에 있는 군대도 겁에 질려 지원하지 않고 지켜만 봤다. 이는 해당 지역의 만이 좁아 많은 수의 배가 안정적으로 포진할 수 없는 지형이었기 때문에 조선군이 상륙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때 이순몽 장군이 예하 부대를 이끌고 상륙해 대마도군을 공격 격파하고 조선군을 구한다. 이후 조선군은 14일간의 작전을 마치고 철수한다. 그러나 대마도의 완전한 항복을 받고 철수한 것이 아니었기에 조선은 경고장을 남긴 채 철수한다.

만약 능히 번연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 줄 것이요. 용사 10여 만 명을 뽑아서 방방곡곡으로 들어가 치면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 같이 오도 가도 못하여 반드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도 하나도 남지 않을 것....육지에서는 까마귀와 소리개의 밥이 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니 아, 어찌 불쌍히 여길 바 아니겠는가, 이제 선지로써 일의 마땅함을 자세히 알게 하노니, 잘 생각하라
-세종실록 4권 중-
조선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후 대마도주는 왜구가 조선을 침략하는 것을 저지했고 대규모 침공은 사라졌다. 이는 이미 왜구의 주력부대가 중국에서 격퇴됐고 대마도 본섬 또한 공격당한 상황에서 다시금 조선의 공격을 받게 되면 생존자체에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마도는 왜구의 조선 침략을 저지하는 동시에 경상도의 일부로 복속되기를 청하는 등 저자세 외교로 조선을 대하게 된다. 대마도에 의한 왜구의 추가 생성을 예방한다는 원정군의 목적을 이룬 세종은 이에 삼포를 개항하고 대마도주에게 통상 권한을 주며 평화관계를 유지한다.
승리로 인한 잠깐의 축제 이후 대외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삼군도체팔사 이종무를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빗발치는 상소가 올라온다. 그 이유는 첫째 전투부대를 선정하는데 제비뽑기를 한 사건, 둘째 공격군에 한 부대만 투입한 것, 셋째 후퇴하는 부대에 대한 지원미비였다. 이에 이종무에 대한 국문을 주장했으나 당시 토벌을 주도했던 상왕 태종은 패전보다 승전이 많은 점, 전투 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 승전한 사령관을 처벌하면 국가의 위신이 하락한다는 점을 이유로 탄핵안을 거부한다. 그러나 신하들은 ‘신하가 공적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 것, 고로 공적은 면책사유가 안 된다. 장군이 작전을 잘 못 세워 병사가 다쳤으니 장군이 책임져야한다’, 라는 논리로 맞섰으나 결국 상왕 태종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됐다.
“이종무가 공신으로서 허락하시는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불충한 자인 김훈(金訓)과 노이(盧異)를 데리고 출정하였으니, 그 죄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1년(1419년) 9월 4일의 기록 중 -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이종무가 원정군에 포함시킨 부하 중 김훈과 노이라는 인물은 전투에 능하나 정식적으로 원정군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고려 때는 부하장수를 정할 때 사적 친분을 이용한 등용이 가능했으나 법치국가 조선에서는 왕의 허가를 받아야만했다. 당연히 이종무는 ‘부하장수 2명을 정벌군에 포함시켜 달라’는 요청서를 올렸고 왕은 이를 구두로 허락했다. 그리고 항구에서 그 내용이 적힌 문서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바람이 바뀌어 시간을 지체하다간 대마도로 출정이 불가능한 상황에 닥치자 기다리지 못하고 출정을 했고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탄핵을 주장했던 신하들은 심지어 이종무의 사형을 주장하고 했다. 이에 이종무의 부하 김훈과 노이는 가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신분이 강등됐다. 또한 이종무는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판결을 받고 ‘이럴 수 있느냐’ 라는 발언을 했고 이것이 또 문제가 돼 유배를 반복하다 사망했다.
이종무·이적·서성을 의금부에 하옥하고, 삼성(三省)에 명하여 함께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중략) 하니, 종무는 그것을 허락하고, 경상도에 이르러서 장계를 올려 훈과 노이(盧異)를 종군하도록 청하고, 회보(回報)를 기다리지 않고 거느리고 갔던 것이다.(하략)
- 세종 1년(1419년) 11월 1일의 기록 중 -

대마도 정벌은 세종 대에 일어난 원정이었지만, 당시 국방권을 양위하지 않은 상왕 태종의 주도하에 벌인 전쟁이었다. 그리고 세종은 그 전개 과정을 모두 지켜본다. 승전을 하고 공을 세웠지만 정치논리에 의한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던 유능한 무장들을 보며 세종은 앞으로 발생할 여진정벌을 위해 미리 충분한 공작을 통해 보완하고 실행한다.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무력으로 응징하며, 왜구를 자발적으로 관리하는 것과 왜구로부터 세금을 얻는 것 중 무엇이 더 이익이 되는지를 철저하게 알려줬다. 그 결과 대마도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왜구를 소탕하며 조선과 무역을 했고 한동안 평화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이 외교로만 외교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대마도주는 안정된 수입원인 왜구의 세금을 포기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일격에 세금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자신들의 거점을 보호하기 위해 왜구를 자발적으로 소탕했다. 그후 조선은 무역을 허락하며 왜구의 세금을 포기한 대마도주의 경제적 이익을 보상해주며 대국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 결과 조선은 왜구에 대한 침략을 예방할 수 있었고 대마도주는 무역을 통한 생존권을 보장받게 된다. 이런 조선의 강온정책(무력응징 후 삼포개항)은 집단과 집단의 관계는 이익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그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은 때로는 강력한 응징으로 그 관계를 재설정해줘 무엇이 서로에게 이익인지를 가르쳐줘야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김경훈 인턴기자 admin@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