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설립되자마자 조선은 남쪽의 대마도를 정벌해 왜구를 토벌하고 중원의 패자 명나라, 만주의 여진 등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는 한편 직접 군사개입을 시도하며 안전한 국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의 지방분권적 성격의 군제를 개혁해 중앙집권적인 군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조선 초기 군사제도 개혁의지와 역동적이었던 군사 활동에 대해 약 7회에 걸쳐 알아본다.

세종의 전격적인 북방정벌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건국 직후 명은 급격히 국력이 쇠퇴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점차 상실했고 조선에 대한 견제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명의 위상이 흔들리는 가운데 조선은 강경한 외교정책을 펼쳐 명의 관직을 받은 여진족에게 조선의 관직을 내려 명의 심기를 건드리며 만주에서의 영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진족 또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실현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한 행동을 취했다.
당시 여진족은 크게 분열돼 지역적, 외교적으로 각 3부류로 구분 지어졌다. 지역적으로는 고구려의 오녀산성 주변의 견주의 여진, 압록강 유역 여진, 동북면 여진으로 구분됐고, 외교적으로는 친조선파, 친명파, 독자세력파로 분열돼 있었다. 또한 같은 부족 내에서도 집안별로 파벌이 나뉘어져 친명파 여진족이지만 조선에 협조적인 내부 파벌이 존재하는 등 만주의 정세는 매우 불안했고 조선, 명, 여진의 긴장관계는 극대화 됐다. 이 때 건주여진의 친명파 어허출 부족은 명과 사돈관계를 맺었고 명과의 특수한 상황을 이용해 주변 부족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 힘을 키워 조선과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한편 현재 북한의 나진, 경원 지역에 해당하는 동북면은 조선의 안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일 뿐만 아니라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른 지역이다. 하지만 이성계가 조선건국을 위해 가문을 이끌고 고려 정계로 뛰어들며 동북면은 주인 없는 땅이 됐고, 그 사이 여진 부족들이 동북면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당연히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북면의 여진족은 알타리, 올량합, 올적합, 먼터무 등으로 이들은 예부터 이성계 가문과의 인연을 주장해온 친 조선파 여진족이었다. 하지만 1410년 올적합 부족의 김문내가 중갑기병 300여명으로 경원을 침공해 경원병마사 한응보와 조선군 15명이 전사하는 사건이 발행한다. 조선군의 피해는 미미했으나 한 지역 안보 책임자인 병마사가 전사한 것은 조선이 군사적 행동에 명분을 주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조정은 이 사건을 주제로 회의를 열었고, 무관 출신 조영무는 강경한 복수를 주장한 한편 대다수의 문관들은 "분쟁은 분쟁을 부르며, 도둑을 이겨봐야 무익(無益)이며 패하면 위신만 상한다"는 주장을 했다. 치열한 논쟁 끝에 태종은 여진 공격에 최종 승인을 내렸고, 이에 군은 토벌을 준비한다.
한창 작전을 준비하던 도중 동북면의 먼터부 부족의 사신이 도착한다. 이들은 자신들도 올적합 부족에 원한이 있다며 이 원정에 선봉에 서서 조선군을 돕겠다라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조선은 올적합 공격에 대해 먼터무와 상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보가 누설됐음을 알게 된다. 또한 동북면에서의 조선의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먼터무와 함께 올적합 공격에 승리한다면 오히려 먼터무가 동북면에서 세력권 확장을 도울 수 있는 상황에 이르기에 조선은 다시 회의를 연다. 처음 복수를 주장한 조영무는 무관 출신이었기 때문에 "먼터무에게 정보가 누설됐다면 올적합의 김문내도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라며 "공격을 포기한 척 하다 4월에 기습적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온건파였던 문관들은 예정대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월, 조선군 1100여 명은 예정된 계획대로 출정을 한다. 본 계획은 먼터무가 조선군에 합류하기로 했으나 약속한 장소와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고 조선군은 단독 작전을 시행했다. 하지만 올적합은 정보를 미리 알고 길목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군을 공격으나 조선군 또한 매복을 대비하고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반격을 했고 추장 4명을 전사시키고 가옥을 불태우는 등 뛰어난 전과를 기록한다. 조선군 입장에서는 먼터무가 조선군을 공격하기 위해 사전에 올적합과 작전을 수립했다고 의심했고, 먼터무는 조선군이 올적합을 공격할 때 본인의 군대도 공격해 피해를 입었다며 주장했다. 조선과 여진의 기록이 상이해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의 최대 우방이었던 먼터무는 반 조선파로 돌아섰고 이 건을 핑계로 조선을 공격, 경원병마사군은 현재 아오지 부근에서 매복에 걸려 최악의 패배(73명 사망 52명 부상)당했고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경원 사수가 힘들어져 경원을 포기하고 후퇴하게 된다.

그러나 경원은 이성계의 본거지 이성계 집안 능이 2개나 있는 왕조의 상징적인 장소였기에 당시 왕이었던 태종은 경원 사수를 강력 주장했다. 하지만 식량이 고갈되고 남은 병사들이 동요하자 경원의 능을 함흥으로 이장(移葬)하며 경원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만다. 이 사례는 왕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징적인 땅일지라도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인 뿐만 아니라 그 군인을 지지하는 주민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동북면에 조선인이 거주하기는 했으나 그 수가 소수였고, 대다수가 여진족인 상황에서 조선군이 주둔한다는 것은 비용도 문제이거니와 그 군대가 토착세력과 연합해 군벌화 하는 경우는 역사의 단골 소재였기 때문이다.
조선이 경원을 포기하고 공식적으로 동북면에서 철수 했음에도 불구하고 먼터무는 동북면을 포기하고 모든 부족을 이끌고 이래 건주여진의 어허출의 땅으로 이동해 이들과 합세한다. 당시의 여진 측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진족은 화해와 갈등이 반복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사건이다. 그렇게 먼터무도 경원을 포기하고 아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경원에 다시 진출하지 못한다. 그리고 10년 후 먼터무가 다시 경원으로 이동하고 어허출의 손자 이만주가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하는 등 여진족의 남하가 시작되자 조선은 다시금 북방에 경계를 두게 되는데, 이 때는 마침 세종이 대마도 정벌을 마친 때였다. <다음 편에 계속>
김경훈 인턴기자 admin@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