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대 사회학과 장덕진 교수가 세계문화지도를 기반으로 설명한 대한민국의 특성을 정리한 자료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세계문화지도는 각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 도식화 한 것이다. 1980년도 초반부터 시작해 5년 주기로 수십 개 국가 국민들의 가치관 변화를 조사하였다. 이 조사는 국가별로 국민들이 전통과 종교를 중시하는지 또는 세속과 이성을 중시하는지와, 생존을 중시하는지 또는 자기표현을 중시하는지를 x축과 y축 위에 점으로 나타낸다. 그리고는 인접한 위치에 자리한 나라들을 밴드로 묶어 내면 하나의 지도가 완성된다.

이 지도에서 살펴보면 대한민국 국민은 세속과 이성의 가치를 전통과 종교의 가치보다 중요시 하는 가운데 자기표현의 가치보다는 생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높은 나라 국민들은 자기표현의 가치를 중시하고 그 반대의 경우 생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성향이 나타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선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민국이 생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좌표 상에서 한국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한국과 사실상 비교 자체가 어려운 나라들이다. 장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소득 2000달러 미만일 때는 전통적이고 생존적 가치를 중시하는 성향을 보이다가 5000달러를 넘어서면 자기표현의 가치가 급상승한다. 다시 1만 5000달러가 넘어서면 세속적이면서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화가 가속화 된다.

그런데 한국은 3만 달러를 넘어선 나라라기에는 믿어지지 않게 2000달러 수준의 의식을 가진 나라 국민들에게서 나타나는 생존적 가치를 중시하는 성향이 아주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겪었던 경험을 중시하고 안보와 성장에 무게중심을 두는 물질주의자들이 이 사회에 비정상적으로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발전과 자유, 시민 참여, 인권, 환경 등을 중시하는 세력은 그만큼 위축돼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OECD 가입 국가는 탈 물질주의자의 비율이 45% 내외로 조사되는데 한국사회는 이들의 비율이 15% 수준이다. 그래서 정치·사회적 성향도 대단히 보수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장덕진 교수의 설명이다. 참으로 호소력 있고 분석적인 설명이다.

장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85%에 해당하는 물질주의자들은 대개 안보와 성장을 강조하는 정당에 표심을 행사한다. 반대로 15%에 해당하는 탈 물질주의자들은 대개 인권과 환경 등을 지향하는 정당에 지지의사를 보인다. 경제정책을 예로 들면 재벌과 대기업 중심의 성장을 강조하는 정책이 분배의 정의와 경제민주화를 부르짖는 정책보다 잘 먹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현대사를 되짚어 보면 아주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보수정당이 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계속 집권을 이어오며 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장남의 권위를 인정하는 전통의식과 이 문제를 연결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세계의 문화권 지도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린 아직도 경제·사회문화적 수준에 비해 아직도 조급증에 휘말려 있어 더 채우려고 열중하고 있다. 더 숭고한 가치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고 아직도 전 근대적인 가치, 물질적 가치에만 의미를 두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려웠던 시절의 상처가 너무 깊고 커서 아직 아물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초고속 성장을 이루어 온 것에 대한 지나친 자긍심도 우리의 가치관 변화를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 불안감과 조급함에서 벗어날 때도 됐으련만 국민들 다수는 아직도 불안해하고 조급해 한다. 우리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누군가 쫓아와 우리가 일구어 놓은 것을 바로 낚아채 가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득 3만 달러 국가의 국민이 아직도 자기표현보다 생존에 큰 가치를 둔다는 조사결과는 충격적이다. 전 세계 200개가 넘는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민국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결과이다. 인권, 참여, 환경, 복지 등의 가치에 주목할 줄 알아야 우리 소득수준에 맞는 가치관을 갖는 나라가 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