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설립되자마자 조선은 남쪽의 대마도를 정벌해 왜구를 토벌하고 중원의 패자 명나라, 만주의 여진 등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는 한편 직접 군사개입을 시도하며 안전한 국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의 지방분권적성격의 군제를 개혁해 중앙집권적인 군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조선 초기 군사제도 개혁의지와 역동적이었던 군사 활동에 대해 약 7회에 걸쳐 알아본다.

여진족의 침입을 계기로 조선은 이만주 부족을 토벌하기 위해 최윤덕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1만 5천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이만주 부족의 주요 거점지는 세종의 4군 6진 중 4군에 해당하는 여연, 무창, 우예, 자성 등지로 이만주 부족을 성공적으로 토벌하기 위해서는 군사를 나눠 동시공격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은 도원수 최윤덕을 중심으로 이순몽을 중군 절제사로, 최해산을 좌군 절제사, 이각을 우군정제사로 임명해 작전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게 계획했다. 이들은 모두 세종이 여진 정벌을 위해 양성한 전투 분야 전문가들이다.
또한 개국공신이었던 아버지 덕에 음서로 무관으로 진출해 활약한 이순몽은 작전 수립 당시 좌군절제사로 임명됐으나 그가 세종에게 집적 이 작전의 목적인 여진족 부락파괴를 이루기 위해서는 삼군이 동시에 여진을 휩쓸어야 하며 그 핵심은 중군이다. 하지만 최윤덕은 너무 신중하기 때문에 그 시기를 놓칠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을 최윤덕 부대 부사령관으로 임명해주면 정예기병 500기로 적을 격파하겠다. 라고 주장하는가 한편, 지자포와 현자포는 크기가 너무 크고 화약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에 야전에서 그 효용성이 떨어진다 라며, 크기가 작은 황자포 사용을 주장하는 등 세종이 양성한 실전형 전문가와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이에 세종은 그의 의견을 수용해 그를 중군 절제사로 배치하고 화포를 개량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조선군은 4월 10일 강계에서 3군이 출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4월 19일 작전이 종료된다. 군사를 동원하고 군량미와 정보를 수집하는 사전 준비 작원을 제외한 순수 작전 기간이 9일 밖에 안되는 짧은 작전이었다. 조선군은 3갈래의 길로 따로 행군해 각기 다른 목표지역을 급습해 뛰어난 전과를 기록한다.

본군 2599명 병력으로 입할라 근거지를 공격해 98명 사살, 62면 포로 5명, 조선군 사상자 25명
중군 2515명 병력으로 이만주 근거지를 공격해 46명 사살, 56명 포로,
우군 1770명 병력으로 마천 등지를 공격해 43명 사살, 14명 포로,
좌군 2070명 병력으로 거여 등지를 공격해 3명사살, 1명 포로.
당시 전과를 판단하는 방법은 목이나 귀를 베는 등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고 그 수를 기반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교사회였던 조선은 이를 반인륜적인 행위라 명하고 금지했다. 또한 신체절단이 발생했다고 해도 이를 전과로 포함시키지 않아 절단 행위 자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도했다. 따라서 조선군은 활에 의해 죽은 적만을 전과로 인정했다. 그 예로 이순몽의 중군 부대에서는 단병접전 끝에 처리한 26명의 참수살과 귀를 절단한 이 2명이 있었으나 행정상의 불이익을 예상해 아에 전과보고를 누락시킨다.
거의 모든 군이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이뤄냈으나 최해산의 좌군 부대가 예상 보다 늦게 도착하는 탓에 거여 지역의 여진족이 모두 도망가버려 낮은 전과를 기록했다. 하지만 1차 여진 정벌의 원 목표였던 이만주 부족의 토벌과 4군의 확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성공시켰다. 또한 이만주의 부락을 파괴하고 그의 가족을 살해하는 등 뛰어난 전과를 기록한다.
성공적인 1차 여진정벌이었지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과 여진의 지리적, 인적관계로 인해 조선이 대군을 준비하고 북방으로 이동하면 자연스레 정보가 여진으로 누출되기 좋은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1차 정벌 또한 마찬가지로 정보가 누설돼 군이 이동할 때 여진족이 모두 산으로 피신을 떠난 후 였다. 하지만 총사령관 최순몽은 농사철인 4월 달 여진족이 농사를 포기하고 장기간 산에서 농성할 수 없다고 판단해 작전을 강행했다. 또한 조선군의 입장에서 여진족 민간인을 학살해 불필요한 희생을 낳는 것을 기피 했기에 조선군은 정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군은 우리 민족의 핵심적인 병기인 복합궁을 주력으로 사용했고, 짧고 외날인 환도와 평균 길이 3.5m에 이르는 장창으로 무장했다. 또한 기존의 화살에 절반 밖에 안되는 짧은 길이인 애기살을 사용했다. 애기살은 조선만이 운용한 조선의 특수병기로 작은 크기로 인해 최대 사거리가 250m에 이르렀으며 눈에 잘 보이지 않았기에 조선군을 상대하는 적군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무기였다. 특히 편전이라고 불리는 대나무 통과 함계 운용되는 특수성 탓에 적은 조선군 사수가 화살을 이미 발사 했음에도 불구하고 편전을 활로 착각해 아직 사수 발사하지 않았다고 착각하게 끔하는 착시 효과 또한 기대할 수 있었다. 강력한 살상력을 보유한 무기였기에 세종은 애기살 발사 훈련을 비밀스럽게 진행하라고 명했을 만큼 내외부적으로 인정 받는 무기였다.

김경훈인턴기자 ggilbo@adm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