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난수 충효정신 기리는 '독락정'

(사)뿌리문화 이사장
전서공(典書公)이 마을 뒤 전월산에 올라 고려 왕조를 향해 절을 했다는 부왕봉(府王峰)과 상려암(想麗岩)등이 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기 1407년(태종7) 6월 21일, 임난수가 죽자 동면 불파미에 묘를 쓰고 이곳에 가묘(家廟)를 세웠으며, 세종임금은 사당에 임씨가묘(林氏家廟)라 사액하고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영원히 옮기지 말것을 명하였다. 사당에는 임난수 장군 초상화가 걸렸는데 임진왜란 때 잃었다.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독락정’의 기호서사를 지키려 신주 일부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며, 1923년 이곳에 유지의 비(碑)를 건립했다.
1957년 전국임씨총회에서 이곳 건물을 중수해 도시조(都始祖)인 충절공 임팔급(林八及)을 비롯한 후손 14위를 모시고 있다.

1437년(세종19년)에 건립한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망망한 들 가운데 있는 나성을 등지고 장송이 우거져 있으며 앞에는 금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정자는 고려 때 임난수가 국권이 조선으로 넘어가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뜻을 품고 벼슬을 사양하고 세속에서 벗어나 금강 월봉 아래에 은거하며 16년을 지내다가 타계하였다. 이에 그의 둘째 아들 임목(林穆)이 선인의 절의를 지킨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임난수의 네 아들 중 큰아들 임모(林募)는 수사(水使: 각 도에 두었던 수영(水營)의 정3품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둘째아들 임목(林穆)은 양양도호부사(都護府使: 조선초기 지방행정기관으로 큰 4개지방에만 처음에는 설치했음. 그곳의 으뜸벼슬)를 셋째아들 임서는 충의교위(忠毅校尉: 5, 6품무관 품계) 좌군사직(左軍司直: 조선때 3군 가운데 하나로 정5품)을, 막내인 임흥은 위의장군(衛毅將軍: 조선 초기 서반(西班)의 정4품 하(下)의 품계명으로 뒤에 소위장군(昭威將軍)으로 개칭됨)을 지냈다.
부안임씨(扶安林氏)는 조선시대에 1827년(순조 27) 임원배(林原培:1806년생)가 정시문과(庭試文科: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보던 과거) 갑과에 장원급제하는 등 문과(文科;대과)에 6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였음)에 11명,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를 뽑던 과거)에 23명, 역과(譯科: 중국어, 몽고어, 일본어, 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 쓰기 위하여 보던 과거)에 1명, 의과에 3명 등 44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
부안은 전북 부안의 옛지명으로, 757년(경덕왕16) 부령현(扶寧縣)으로 이름을 바꾸어 고부군(古阜郡: 정읍시 고부면 일대)의 영현으로 삼았다. 1018년(현종9)에 감무(監務: 중앙에서 파견된 작은현의 감독관)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고 보안현(保安縣) 감무(監務)도 겸하게 하였다. 조선초까지 부령현과 합병과 분리를 반복해 오다가 1416년(태종16) 보안(保安)과 부령현(扶寧縣)을 부안현(扶安縣)으로 병합하였다. 1417년에 흥덕진을 옮겨 병마사 겸 판현사를 두었으며, 1423년(세종5)첨절제사로 고쳤다가 현감을 파견했다. 1896년 전북 부안군이 됐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부안임씨는 1985년에는 1만 1543가구 4만 8043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1만 9537가구 6만 3589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