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민족정신의 근원을 찾는 새로운 관점으로

권태달 부동산학 박사

조선의 풍수는 한양의 도읍 입지 선정을 시작으로 집단 취락인 마을을 구성하는 양택 풍수의 관점에서, 중기 이후에는 묘지 혹은 개인의 주택을 대상으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성격을 이루었고, 후기에는 점차 음택 위주의 묘지풍수로 전환되었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는 일본에 의해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정책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미신(迷信)으로 일축하여 비하(卑下)하는 등 조선의 재건을 막는 데 일조하였다.

해방 후 풍수지리는 서양의 인문지리학 연구 분야와 동질성을 찾을 수 있었으나, 그 설명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자연지리의 현상에 대한 설명을 더하여 눈에 나타나지 않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내용도 함께하였다. 나아가 민족 전통의 유·불·선교와 자연 숭배사상, 삼신사상, 민속 종교 등과 습합한 자생 풍수적 사고를 더하여 종교적 믿음으로까지 인식되고 이해되었다. 풍수는 우리 고유의 전통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정착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질 못하였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의 왕권은 그들의 통치이념인 종교적 관계에서 불교와 유교와의 차별적 대우와 통치자의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늘 소외되었으나, 그나마 새로운 개혁과 시대를 주창하는 힘없는 백성들에 의해 전승되어졌다.

오늘날에도 풍수는 일부 인문과학적 측면의 연구자로부터 미신이나 비과학적 학문으로 치부되어 모멸을 받는 입장에 처해 있다. 이들은 풍수를 마치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명쾌한 설명만을 요구하고 있으며, 민족을 이용한 국수주의자나 등산객을 위한 취미의 대상으로 매도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최근에 우리 것을 찾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으나, 서양 학문을 전수한 지리학자들에 의해 어렵게 연구하는 풍수의 면학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수고는 더 이상 하여서는 아니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풍수는 우리 역사 속에서 위로는 최고 권력자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에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왕조의 통치 이념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민족 주체성 확립을 위한 개혁자와 신분타파의 혁명적 사상의 기틀도 만들었고, 나아가 정신적 지주로서 종교적 사상을 내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풍수는 단순히 학문적 차원의 연구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의 근원을 찾는 구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새로운 관점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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