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풍·득수 고루 갖춘 전형적인 명당 지세

북한산

현재의 서울인 한양은 풍수상 우리나라의 도읍이 될 수 있는 3대 명산의 하나로 장풍(藏風)과 득수를 고루 갖춘 전형적인 명당의 지세이다. 종산(宗山)이면서 진산(鎭山)인 삼각산은 북한산(北漢山)이라 칭하고, 백운봉, 국망봉, 인수봉이 병립하여 구름 속에 나타나는 세 봉오리의 부용과 같아 삼각산이라 한다.

한양은 한반도의 핵심적인 중핵지(中核地)에 위치해 예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된 곳이다. 수도(首都)의 입지로는 백제 초기에 잠깐 수도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고려시대에 도선대사의 기록인 도선비기(道詵秘記)의 영향으로 개국 후 16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당시 주(州)였던 곳을 남경(南京)으로 명칭이 승격되고 신궁이 조성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공민왕은 일시적으로 한양에 도읍을 정한 적이 있었다.

이중환은 일찍이 한양의 북악과 인왕산의 산세(山勢)가 사람들을 두렵게 해 살기(殺氣)가 없는 개성만 못하며, 명당 안은 물길이 너무 낮으면서 허하고 앞쪽으로는 관악산이 비록 한강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역시 가까워 정남향을 하기에는 좋은 편이 못된다고 했다. 또 주산(主山)의 배정도 지나치게 도성(都城)에 치우쳐 도시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있으나, 남산의 한 줄기가 강을 거슬러 판국을 만들었고, 판국 안이 명랑하고 엄숙하며, 흙빛이 깨끗하고 인사(人士)가 막히지 않고 밝고 영리하다고 했다.

한양은 풍수지리의 오행론(五行論)을 조선 왕조의 지배 이념인 유교사상을 접목하여 도성을 축조하였다. 당시 궁성의 터를 불교를 대표하는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정하고자 하였고, 유학자인 정도전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정남향 배치를 강조하는 등 첨예한 대립에서 결국 한양 도성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 이에 유학의 오상(五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이름을 딴 4대문(동서남북)과 보신각을 지어 유교의 덕목을 널리 퍼지길 기원했다. 또한 풍수를 조선의 전문 기술직으로 과거 시험에 음양과(陰陽科)가 포함되어 여기서 선출된 이들로 하여금 궁궐 및 왕릉의 선정과 이전 등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게 했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