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침구서적 '침구경험방' 허임의 살아있는 임상 경험 담아

(사)뿌리문화 이사장
허임은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한의(漢醫)이다.
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에 따르면 허임은 하양허씨 문경공파 21세손으로 허락(許珞)의 아들이다.
허임은 어렸을 때 부모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일을 해주며 의술에 눈이 틔었다고 한다.
1593년 약관의 나이에 침의로 발탁돼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대왕 일행을 수행하며 침 치료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침술치료효과 때문에 임금으로부터 포상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한다. 출신 성분을 뛰어넘는 인사 조치에 대한 관료들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반(東班,양반 가운데 문반(文班)을 달리 이르던 말로 궁중의 조회 때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벌여 선 데서 나온 말)의 위계(位階)에 이르렀고 경기 지방 요지에 수령으로 제수됐다.
1604년 9월 야간에 발병한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한 공으로 6품에서 당상관(堂上官, 정3품이상벼슬)으로 승진했다. 1612년 광해군 4년 임진왜란 중 선조를 시종(侍從,왕을 모심)한 공을 인정받아 3등 공신으로 됐으며 허준과 함께 의관록에 기록됐다.
이후 영평현령(縣令,종5품수령), 양주목사(牧使,정3품수령), 부평부사(府使,정3품수령)를 거쳐 남양부사에 특별히 임명되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렇지만 광해군이 “그는 어미와 함께 사는데 궁핍하여 생활할 수 없는 처지”라고 걱정할 정도로 청렴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전주이씨 덕천군파 파조 이후생의 6대손으로 당대의 대문필가로 알려진 이경석(李景奭,1595∼1671,자는 상보, 호는 백헌)은 ‘침구경험방’ 발문에서 책의 저자 허 임을 이렇게 소개했다. 당시 조선의 의료에서 허임이 차지한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유학을 온 일본인이 허임의 ‘침구경험방’을 가져가 판본을 내면서 쓴 서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젊은 시절 조선에 유학하였다. 면학하는 틈틈이 의인(醫人)을 접하여 자주 침구(鍼灸)가 의가(醫家)의 요체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실제로 병을 고치는데 그 효험이 가장 빠른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치료방법으로써 첫째가 모두 허씨(許氏)의 경험방을 배워서 하는 것이었다.”
17세기말 18세기 초에 조선에 유학 왔던 오오사카 출신 의사 산센준안(山川淳菴)은 ‘조선이야말로 침자(鍼刺)가 가장 뛰어난 나라’라고 목격담을 전하고 있다.
그는 “평소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는 말이 정말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고 감탄한다. 바로 이 탁월한 조선의 침구술이 하나같이 허임방이라는 것이다.
1623년(광해군 15) 의관들이 임금의 하교를 외부로 누설시켰다는 이유로 감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감봉 사건 20년 후인 1644년 허임이 70대에 이르러 조선시대 최고의 침구 서적인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이 간행됐다.
허임은 자신의 임상 경험을 후대 사람들이 널리 활용하기를 기대하였는데, ‘침구경험방’의 여러 판본이 간행돼 허임의 기대는 많은 부분 실현됐다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침구경험방’ 동의문견방(東醫聞見方)가 있다.
허임의 묘는 원래 공주시 장기면 무릉리 있었으나,1981년에 부모 묘소와 아들의 묘소가 있는 공주시 우성면 한천리로 이장됐다.
하양허씨는 조선시대에 허부(許溥,1663 癸卯生)가 서기1693년(숙종19년) 문과 정시(庭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대궐 안에서 보던 과거)의 갑과(甲科)에 장원급제 한 것을 포함, 문과(文科;대과)에 13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5명,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를 뽑던 시험)에 21명 등 3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조사에서 하양허씨(河陽許氏)는 1985년에는 3596가구에 1만 4789명, 2000년에는 5081가구에 1만 6344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