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 주역 박원조 집안 번성한 성씨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신원사입구)의 순천박씨들은 중종반정 주체인 박원종(朴元宗,1467~1510, 자는 백윤, 시호는 무열)의 집안이다.
이들은 박원종의 사촌인 순성군 박이검(朴而儉)의 후손들이다. 박이검은 공조판서(정2품장관)에 증직되고 순성군에 봉해졌으며,시호는 양평이다. 박이검의 아들인 박인손(朴麟孫,1498~1553)이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이거(移居)하면서 번성한 성씨다.
박원종의 할아버지는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박거소(朴去疎)이고, 아버지는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 박중선(朴仲善)이며, 어머니는 행(行) 호군(護軍,정4품장군) 허곤(許稇)의 딸이다.
공신 가문에서 태어나 음보(蔭補)로 호군(護軍)이 되고, 1486년 선전관(宣傳官)에 올라 이 해에 무과에 급제하면서 성종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492년 승정원의 동부승지(정3품당상관)로 발탁되자 사헌부에서 나이도 어린데다가 무과 출신에게 동반의 3품직을 제수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해 서경(署經,왕이 관원을 임명 한 뒤에 그 성명,문벌,이력 등을 써서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에게 그 가부를 묻던일)을 보류하자, 성종이 다시 공조참의(정3품차관보)로 발령했다.
이에 대해 사헌부가 다시 반대하자 병조참지(정3품국방차관보)로 임명했다.
그 뒤 연산군의 특명으로 동부승지, 우부승지(정3품당상관), 좌승지(정3품당상관) 등을 역임하면서, 재정의 긴축 문제 등 시무책(時務策:당시 해결해야할 긴급한 정책 과제)을 건의해 실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연산군 6)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좌천됐다가 한성부우윤(종2품서울시행정부시장)을 역임하고, 1502년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1506년 경기관찰사(종2품 지방장관 감사)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1506년 성희안(成希顔).류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했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우의정(정1품 정승)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진봉(進奉)됐다.
좌의정(정1품정승)을 거쳐 1507년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이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대간들의 탄핵이 지나치다라고 건의해 이를 견제했으며, 이우증(李友曾).조윤손(曺潤孫).이순(李珣) 등을 천거해 임용시키기도 했다.
1509년 왜적이 제주도 공마선(貢馬船)을 약탈하자, 이를 문책하기 위해 대마도(對馬島)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자고 건의하였다.
또한 전라도 조운선(漕運船) 40여 척이 파선, 침몰하자 해운을 폐기하고 육지 운송을 주장하기도 했다. 같은 해 영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무신 출신이었지만 문장을 즐겼고 서화를 좋아해 수집에 힘썼다. 중종 묘정에 배향됐다.<문헌참고>
박인손(朴麟孫,1498~1553)은 원래 전남 영암 출신인데,아버지 박이검(朴而儉)과 함께 영암으로 가던길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경천역(지금의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 입구)에 머물던 중 병이 나서 혼자 남게 되었다가, 진주정씨(晋州鄭氏) 가문의 정세규(鄭世規)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됨으로써 계룡면 양화리의 순천박씨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공신의 아들로 수충좌위상호군(守忠左衛上護軍,정4품장군)의 벼슬을 받았으며, 그의 손자인 박정제(朴廷濟)도 이괄의 난때 인조의 어가(御駕)를 호종(어가를 뒤따름)한 공으로공신녹권(功臣錄卷)을 받았다. 그의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공주순천박씨공신녹권2책(公州順天朴氏功臣錄券二冊)은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75호로 지정됐다. 묘는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능뫼에 있다.
박인손의 손자인 박정제는 음서(蔭敍:아버지나 조부가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때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채용하는 제도)로 참군(參軍:훈련원.한성부의 정7품)을 지내다, 인조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를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여 공주에 이르렀을 때, 배가 없자 벗은 몸으로 얼음을 깨고 금강을 건널 수 있게하여 원종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사)뿌리문화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