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나리타 공항

평소 여행을 좋아해서 시간만 나면 카메라를 들춰 메고 집을 나서곤 한다. 지난해만 해도 1월에는 일본 간사이 지방을, 2월에는 제주도, 5월에는 여수~순천, 7월에는 규슈 전 지역, 8월에는 강화도, 석모도, 교동도를, 10월에는 양산 통도사 등 경남 남해안을, 12월에는 상해~쑤저우를 여행했다. 여행 사진과 정보는 개인 블로그에 올리고,​ 또 지면에 연재하던 중 지난해 7월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일본 여행칼럼을 중지하고, 터키와 그리스 지방을 소개했었다. 

일본서기

올해부터는 중국 여행을 소개하면서 코로나바이러스 진원지를 돌아다닌 것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여행칼럼을 단축하고, 5월부터는 지난 7월에 중단했던 일본 기행을 소개하기로 했다. 물론 아직 한일 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자칫 시일이 더 지나가다가는 지난해 세 차례 여행한 일본 자료가 낡거나 크게 달라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미 그렇게 시기를 놓친 자료가 그리스, 영국, 프랑스, 인도네시아 등 몇 나라가 있다. 

도쿄 아사쿠사

사실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통해서 대륙의 선진 문물을 전해 받으면서 성장해온 나라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나라가 아니다. 물론, 지금처럼 영토와 국경 개념이 엄격하지 않았던 고대부터 일본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해서 학자와 승려를 통해서 한자·불교 문화 등 많은 선진 문화를 받으며 발전해왔음에도 이런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또, 섬나라 일본은 생산물이 부족해서 고려와 조선에 조공하며 문물을 받아오면서도 수시로 한반도 남해안과 중국 해안을 습격하여 식량과 재산을 약탈하는 왜구로 변신했다.

나라 동대사

더더구나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무사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하여 명을 정복하겠다며 벌인 임진왜란(1592~93)과 정유재란(1596~98) 등 전후 7년에 걸친 전쟁은 우리에게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줬다. 도요토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요청으로 조선은 1607년(선조 40) 국교를 재개하여 1876년 강화도 수호조약을 맺을 때까지 전후 12회의 통신사가 내왕했으나, 한 말 일본은 또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동안 식민통치를 자행한 일본은 우리에게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너무 먼 ‘가깝고도 먼 나라(ちかくて とおい国)’가 틀림없다. 이웃 나라끼리 평화롭게 지내지 못한 경우는 비일비재한데,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가깝고도 먼 나라에 관하여는 1월 8일 자 '중국 개요' 참조) 

도쿄타워

북쪽 홋카이도에서 남으로 혼슈·시코쿠·규슈 등 4개의 큰 섬과 이즈제도(伊豆諸島)·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류큐 열도(琉球諸島)로 구성된 일본은 37만 7873㎢ 면적에 1만 2700만 명(2018년)이 살고 있다. 일본은 712년 고사기(古事記)가 최초의 역사서이고, 720년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그 후 속일본기(續日本記)가 있지만, 그 책들은 시기적으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이후에 저술된 것이다. 게다가 고사기 저자는 태안만려(太安萬呂: 오노야스마로)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그는 백제 왕족인 안만려(安萬呂)이다.

나라 법륭사 오중탑

또, 나라 시대인 680년 덴무(天武) 천황 때 일본의 신화시대부터 지토 천황(持統天皇: 645~702) 시대까지의 편년체 역사를 기록한 일본 최초의 정사 전 30권의 일본서기도 백제 패망 후 건너온 백제계 왕자인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다. 이렇게 일본의 역사서 모두 백제계 도래인들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660년 7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하였을 때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 642~645, 655~661)이 말한 일본서기 기록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오사카성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百濟國 窮來歸我)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以本邦喪亂), 
이제는 더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靡依靡告)." 

그 뒤 백제 부흥군의 끈질긴 투쟁에 663년 일본군과의 연합작전마저 금강하구 백강 전투에서 패망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덴지 천황(天智天皇) 2년(663) 기사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교토 금각사

일본은 그때까지 왜(倭)라고 칭하던 국호를 버리고 일본(日本國)이라는 새 국명을 붙였으며, 백제계 왕자들이 펴낸 일본서기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를 적대시하며, 백제를 계승한 일본국이 신라보다 더 위대한 국가라는 자존심을 고양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극도로 악의적인 기록 하고 있다. 한반도의 신라는 물론 고구려․백제까지 모두 일본국에 조공하거나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등 만용을 부리기도 하는데, 우리는 일본서기를 무조건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그 행간을 밝히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히메지성

아무튼 일본의 사서들을 종합해보면, 일본은 3세기 중엽 한반도 가야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나라 지방에 야마타이국 혹은 야마도 정권(大和朝廷)을 세웠다. 야마도 시대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고분이 발달하여 야마도 시대를 ‘고분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규슈 지방에 이주하여 많은 인적․ 물적 교류를 하던 백제 도래인들은 6세기경 나라 지방으로 진출하여 야마도 정권을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웠다. 특히 긴메이(欽明) 천황 13년(552) 백제의 성왕이 불상과 불경을 보내어 불교를 받아들일 것을 권했을 때, 일본 조정에서는 찬성파와 반대파가 30여 년에 걸친 갈등 끝에 친 백제파인 소가우마코(蘇我馬子)의 승리로 불교가 수용되었다. 

사가현 도공 이삼평 비

소가씨는 592년 조카딸 스이코(推古)를 천황으로 만들었으며, 스이코 천황의 조카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는 소가씨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아스카라는 불교 문화를 이룩했다. 나라의 법륭사에는 쇼토쿠 태자와 그 어머니의 발자취가 가득하다. 이처럼 나라 지방은 고구려․ 가야 도래인들이 다스리다가 백제계 도래인들에게 지배권이 바뀌었을 뿐 한반도 도래인들의 세계임에는 변함이 없다. 

쇼토쿠 태자 사후 고토쿠 천황(孝徳天皇)이 645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다이카 개신을 단행하면서 수도를 나라에서 나니와(難波: 오사카)로 옮겼다. 그러나 667년 덴지 천황(天智天皇)이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오쓰쿄(大津京: 오쓰 시)로 천도했는데, 672년 덴지 천황의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한 덴무 천황(天武天皇)은 다시 아스카로 천도했다. 

후쿠오카 다자이후덴만구

710년 겐메이 천황(元明天皇: 661~721)이 아스카에서 헤이조쿄(平城京: 나라)로 천도한 이후를 ‘나라 시대(710~784)’라고 하는데, 이렇듯 빈번한 왕권교체는 백제․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가야계, 백제계, 고구려계의 권력 다툼에 불과했다. 그 후 784년 백제계 도래인으로 알려진 간무 천황(桓武天皇: 781~806)이 나라에서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이후 1192년까지를 헤이안 시대라고 하는데. 간무 천황은 교토를 당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황궁을 중심으로 23㎢ 면적에 좌우에 똑같은 크기의 1200개 구역으로 나눈 계획도시를 건설했다. 이것은 일본의 왕권이 크게 안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시마바라 운젠 지옥온천

이후 교토는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에도(東京)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약 1100년 동안 수도였지만, 사실 헤이안 시대에 천황의 권력은 미약했고 쇼군들이 실권을 장악한 바쿠후 시대였다. 1889년 일본은 제국헌법을 공포하여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는데, 2002년 3월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아키히토 일왕(明仁)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백제 도래인의 후손임을 고백해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2019년 4월 30일 아들에게 천황 직을 이양하고, 신 일왕의 연호는 레이와(永和)라고 한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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