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1회·이인제 2회·이회창 3회 출마 ··· 결과는 씁쓸
1987년 6월항쟁이란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쳐 국민들은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대통령직선제를 15년 만에 되찾았다. 대통령직선제와 함께 정치활동에 제한을 받던 이른 바 3김이라 불리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3인방의 활동이 시작됐다. 3김의 출현은 민주화의 시작이기도 했지만 한국 정치가 지역구도로 재편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 때 13대 대통령선거를 시작하면서 비롯된 지역구도는 국토를 좌우로 나눠 서로 다른 표심을 행사하게 했고, 이 때부터 충청권에서는 독단적인 힘으로 대통령을 배출하는 일이 어렵다는 정치패배주의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지금껏 충청인들의 대권 도전은 계속됐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13대 대선 이후 충청인들의 대권도전사를 정리해봤다. 3차례 대권에 도전했던 이회창 후보는 황해도 서흥군 출신이지만 충남 예산에 선산을 두고 있고, 자유선진당을 거치며 충청에 기반을 둔 정치색을 보여 충청출신으로 폭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13대 대선(1987.12.16)
노태우 후보와 함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3김이 모두 대선에 나서 접전을 벌인 끝에 노태우 후보가 828만 2738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선거에는 김종필 후보가 유일한 충청권 출신이었고, 그는 182만 3067표로 4위에 머무는 성적을 거뒀다.
◆14대 대선(1992.12.18)
3김 중 김종필은 김영삼에게 후보를 양보하고 출마하지 않아 영남과 호남의 대결이 극에 달했던 선거로 영남을 등에 업은 김영삼 후보가 997만 7332표로 당선됐다. 당시 선거에는 국회의원을 역임한 남장 차림의 여성정치인으로 서천 출신인 김옥선 후보가 충청권 주자로 나섰으나 8만 6292표를 얻는데 그쳤다.
◆15대 대선(1997.12.18)
이회창과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싸움에서 이인제 후보가 승패를 갈랐던 선거였다. 이회창 후보에게 한나라당 당내 경선에서 패했던 이인제는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도전했다. 그 결과 이회창 후보가 993만 5718표를 얻어 1032만 6275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에게 무릎을 꿇게 됐다. 이인제 후보는 492만 5591표를 얻었다. 세 명의 막강 후보 중 두 명의 충청출신이 2위와 3위로 고배를 마신 선거였다.
◆16대 대선(2002.12.19)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와 맞대결을 펼친 선거였다. 당시 이회창 후보의 압도적 승리가 예상됐지만 막판 노무현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당선된 노무현 후보는 1201만 4277표를 얻었고, 2위 이회창 후보는 1144만 3297표를 얻었다. 당시 선거는 양강 구도 속에 치러졌고 패한 이회창 후보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7대 대선(2007.12.19)
이회창, 이인제 두 명의 충청출신 후보가 출마한 선거였지만 두 명 모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체적인 구도는 이명박 후보가 크게 앞서며 정동영 후보가 뒤를 따르지만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회창과 이인제 두 후보는 당선 가능성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이명박 후보가 1149만 2389표로 무난히 당선됐고,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는 각각 355만 9963표와 16만 708표에 만족해야 했다.
김도운기자 8205@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