킥보드 타는 대리운전기사 58세 송동의 씨의 '희망가'

섬뜩했다.

자정을 넘긴 시각. 인적 하나 없는 으슥한 골목을 빠르게 지나쳐, 내 앞으로 다가온 한 남자. 순간 ‘쫄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지만 주먹은 이미 불끈. 그 때 남자가 말했다. “대리운전 부르셨죠 고객님?”

휴…멈췄던 숨을 내뱉는 사이 누런 가로등 불빛에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작달막한 키에 5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나이. 전형적인 숏다리(?) 한국인이다. 안심이다.

그런데 그의 옆에 바투 서 있는 ‘킥보드’가 눈에 들어온다. “콜 하나라도 더 뛰려고 (킥보드를) 타기 시작했는데 건강도 챙길 수 있고 좋은 것 같네요”

그때였다.

‘나의 삶은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한가’라고 묻는 어느 흘러간 노래 가사가 갑자기 뒤통수를 잡아끄는 듯했다.

◆총알 탄 사나이? 나는야 ‘킥보드 탄 사나이’

2년차에 접어든 대리운전 기사 송동의(58) 씨는 투잡 중이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유성에 있는 모 연구소로 출근한다. 거기서 송 씨는 파견직으로 환경미화 일을 하고 있다. 사무실 청소를 비롯해 동료 아주머니들이 못하는 힘쓰는 일을 주로 한다. 오후 6시면 퇴근해 저녁을 먹고, 다시 새벽 1시까지 대리운전을 뛴다.

“많이 자야 하루에 서너 시간 자는데 그렇게 피곤한 줄은 모르겠다”고 말하는 송 씨가 철인처럼 느껴졌다. 말끝마다 그는 ‘가장으로서’를 붙였다.

킥보드를 타게 된 건 “나이 먹고 운전을 오래하다 보니 허리가 아파서”였다. 무릎이나 발목 등 관절이 아픈 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다. 성질 급한 대리운전 고객들을 기다리지 않게 하려면 시간이 생명이고 뛰는 것 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 탈 땐 넘어지기도 많이 했어요. 도로 사이 작은 틈에 걸리기도 하고. 이젠 많이 숙달되기도 했고, 요즘엔 자전거 도로가 잘 돼 있어 이동하기 수월한 편이죠.”

완연한 봄, 바람을 가르는 바이크족이 연상되는 자전거도로의 이미지에 한 가장이 짊어진 무거운 돌덩이가 얹혀졌다.

다른 동료들은 귀찮아서 안 가는 좀 먼 동네도 그는 콜만 떨어지면 킥보드를 타고 간다. 예를 들어 은행동에 대기하고 있다가도 주변 대흥동이나 선화동에 콜이 있으면 무조건 받는다. 그의 날렵한 애마를 타고 발을 구르면 10분 내로 도착해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하루 7∼8건의 콜을 소화할 수 있는 나름의 비결인 셈이다.

◆나도 왕년엔…
송 씨는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골(경기도 이천)서 농사짓던 그가 대처(대전)로 나온 때는 1985년,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대전 처녀를 만나 애 둘 낳고 살았으니 이젠 대전이 고향에 진배없다.

처남의 도움으로 엘피가스 관련 업소를 3년 동안 운영했다. 잘 나가던 시절이다. “그때 그 일을 계속 했으면 돈 좀 벌었을 텐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가게는 매각됐고 이후 송 씨는 학교사무보조원, 학교 납품, 소독회사, 청소 등을 전전했다.

“농사짓던 사람이 무슨 특별한 기술이 있었겠어요?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나마 아내가 하던 치킨 장사가 잘 돼 사는 맛이 있었다. 많이 팔리는 날은 하루 40∼50박스가 나갔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항상 꿈처럼 스쳐 지나간다.

1998년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기업연쇄부도와 강도 높게 추진된 노동시장 유연화정책에 따라 대규모 실업이 발생했다. 하루아침에 룸펜으로 전락한 왕년의 넥타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아파트 옥상’과 ‘자영업 등 창업’이었음이 수치로 증명된다.

이른바 아이엠에프(IMF) 환란의 여파가 본격화된 1998년 고의적 자해(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8622명. 90년대 초중반 3000∼4000명 수준이던 자살자 수가 배 이상 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 30·40대 남성의 사망률은 2배로 껑충 뛰었다.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던 허리들이 작살난 때다.

실업률의 경우 통계청의 보수적인 수치를 따른다 해도 8%대다. 200만에 가까운 인구가 경제위기 한파에 바짝 엎드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자영업 인구는 1990년 506만여 명에서 97년 590만까지 폭증했다. 우리 경제가 냉동되기 전 호황을 탄 자영업의 전성기였다. 이후 날카롭게 급전직하하는 경기 그래프는 자영업에도 비수를 꽂았다. 500만 중반으로 내려앉은 자영업은 그럼에도, 노동시장 재진입에 실패한 가장들의 마지막 목적지로 여겨지면서 치킨가게와 슈퍼마켓, 음식점 등 창업의 열기를 이어갔다.

한쪽(기업)의 목을 틀어쥐니 다른 한쪽(시장)이 팽창하는 일종의 풍선효과였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송 씨는 “우후죽순 경쟁업소가 생겨나고 주변에 대형마트까지 들어서면서 치킨 가게 매출이 급감했다”며 “도저히 배겨날 방법이 없어 장사를 접게 됐다”고 술회했다.

설상가상 아버지가 폐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송 씨에게 무인년(1998년)은 참혹했다.

◆킥보드 사나이, 희망을 말하다
하루 20시간을 깨 있는 송동의 씨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그리 어렵지 않은 물음이다. 대한민국 모든 부모들의 희망이 자식들 말고 또 있던가.

송 씨는 슬하에 아들과 딸 하나씩 두고 있다. 관광경영 계열 학과를 졸업한 아들은 인천공항 근처의 유명 호텔에 취직을 했다. 국립대에 재학 중인 딸은 알바(아르바이트)하느니 공부로 승부하겠다는 쪽이다. 대학 입학 후 매년 성적장학금을 받고 있으니 부모 등골 뺀다는 등록금 걱정만큼은 덜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새벽이슬 밟으며 일을 하는 건 가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낀다 해도 고정적으로 나가는 생활비를 감당해야지 않은가 말이다.

송 씨는 “청소와 대리운전 두 가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딸의) 등록금을 마련해 줄 정도는 안 된다. 남들한테 신세 안지고 식구들 먹여 살리려면 이 정도 고생은 해야지 않겠느냐”고 담담히 얘기했다.

오히려 그는 아내를 걱정하고 있었다. 얼마 전 집으로 모셔 온 팔순된 노모를 수발하려면 아내가 고생할 것이라는 이심전심이다. 오랜 시간 고락을 함께 헤쳐 온 부부의 끈끈함과 애틋함이 전해졌다.

50년대 중반 태생에 우리 사회의 질곡과 영욕을 오롯이 겪어 온 베이비부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노부모를 모시고 나어린 자식들을 여전히 거둬야 하는 고단한 세대. 그에게 그야말로 전형적인 질문을 던졌다. 꿈 또는 희망을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별 거 있나요. 우리 애들 잘 되는 게 최고죠. 한 가지 더 욕심 부린다면 몸 건강하게 지금 하는 일들 잘 해 나갔으면 합니다.”

모범답안 같은 대답이, 도리어 이 시대 고개 숙인 아버지들의 숙명인 듯 느껴져 잠시 먹먹했다.

점심시간 동안 짧은 인터뷰를 끝내고 막간 포토타임을 가졌다. 카메라 뷰파인더에 맺힌 그의 어색한 미소가 5월 햇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문승현 기자 papa@ggilbo.com

 

대전 대리운전기사들의 애환

밤 꼬박 새워 10시간 일해도 6만원 정도 손에 쥐어

대전지역 대리운전기사는 현재 3000여 명(등록기사 기준)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전업기사는 1500여 명으로 보통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꼬박 10시간을 일하고 있다. 그렇게 만지는 돈은 6만 원 가량. 한 달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해야 채 200만 원이 모이지 않는다. 전체 인원의 30% 정도가 대리기사 외에 투잡을 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과격한 음주 후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라 그럴까. 그네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호기심을 갖기엔 내 한 몸 추스르기도 바쁘다. 간단히 목적지만을 댄 채 전화를 하거나, 곤한 잠에 빠져들거나 하는 게 우리 모습 아니던가 말이다.

대전지역 대리운전노동조합은 지난해 7월 3일 만들어졌다. 노조원은 420명이다. 전업기사 넷 중 하나가 가입했다. 대리운전 관련법도 없고, 법적 지위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연대’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달 9일 대전과 서울·경기·인천·대구 등 각 지역 기사들이 힘을 합쳤다.

전국대리운전노조 대전지부 송재성 사무국장은 “콜센터와 대리기사의 관계는 주인과 머슴 정도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기사가 아무리 옳아도 센터에 항의한다거나 불합리함을 지적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며 노조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송 국장은 이어 “대리운전기사로 등록하려면 하루 3500원(월 10만 5000원)을 관리비로 내야 하는데 다른 지역은 관리비라는 말 자체가 없다”며 “보험료와 프로그램사용료 등 명목으로 청주는 8만여 원, 대구는 7만 5000여 원을 받고 있다. 대전이 유독 비쌀뿐더러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알 수 없다”고 열악한 근무상황을 전했다.

노조가 대리기사 권익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꼽은 이유다. 그 첫 발걸음은 ‘노동자 지위 획득’이다. 향후 대선 과정에서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전략이다. 관련법 제정 청원도 마찬가지다.

문승현 기자 papa@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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