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사상 알리고 절의(節義) 숭상
안정라씨(安定羅氏) 시조는 공민왕때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을 지낸 라천서(羅天瑞)이다.
그는 1370년(공민왕19) 동북면 원수(元帥)이성계가 요동의 동녕부를 정벌하고 귀환할 때 추위와 기근으로 아사지경에 이른 1만 5000여 군사에게 수백석의 양곡을 제공해 무사히 생환시켰다고 한다.
또한 왜구의 칩입 때 공을 세워 안천군(安川君)과 안정백(安定伯)에 봉해지고, 안정(安定)을 식읍(食邑:고을의 조세를 받아쓰게 하는 것)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본관을 안정(安定)으로 삼게 됐다.
안정라씨(安定羅氏)의 대표적 인물은 시조 라천서의 10대손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정3품 차관보)를 역임하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때 공을 세운 라만갑羅萬甲)이다. 라만갑은 1592년 임진생으로, 1623년(인조1)에 알성시(謁聖試: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고 알성한 후 보던 과거)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라만갑의 아버지 라급(羅級)은 1585년(선조18)에 식년시(式年試: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시험)갑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평산부사(平山府使:정3품 수령)를 지냈다. 증조부인 라식(羅湜), 라숙(羅淑:중종 19년(1524)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라익(羅瀷) 3형제는 모두 중종 때 문명(文名)이 높았다.
또한 해주목사(海州牧使:정3품수령)로 치적을 올린 라성두(羅星斗)와 순조때 시(詩)와 서예로 이름난 라열(羅烈), 라걸(羅杰) 형제가 유명했으며, 인조때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친 라응서(羅應瑞) 등이 가문을 크게 빛냈다. 안정라씨는 문과(文科:대과)에 15명의 급제자를 포함 모두 47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
안정(安定)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의 옛지명으로, 940년(고려 태조23)에 안정현으로 개칭했으며, 1390년(공양왕 2)에 감무(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고 비옥현까지 관할했다. 1421(세종 3)안정과 비옥을 합쳐서 안비현으로 개칭했다가 1423년(세종5)비안으로 고쳤다. 현재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이다.
인구조사에서 안정라씨는 2000년에는 2216가구에 7211명이었다.
안정라씨는 라천서 이후 합문지후(7품) 라직경(羅直卿), 보성군수(종4품수령) 라휘(羅暉), 죽산현사 라경손(羅慶孫), 양산군수 라유선(羅裕善)에 이르기까지 4대(代)를 독자로 내려오다가, 5세(世)라유선이 세 아들을 둬 큰아들 한성참군(漢城參軍, 한성부의 정7품으로 원래는 참군 2명을 두었는데 1469년(예종 1) 직제를 개편하면서 1명을 더 두어 모두 3명이었음) 라계종(羅繼宗)의 후손을 경파, 둘째 아들 청산현감(靑山縣監) 라연종(羅連宗)의 후손을 회덕파(懷德派), 셋째 아들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인 도호부에 파견된 관직으로 고려때는 4품 이상, 조선때는 종3품이었다. 원래 군이었는데 호수가 1000호 이상인 곳을 도호부로 승격시켰고, 19세기 말에 군수로 다시 바뀜) 라사종(羅嗣宗)의 후손을 청주파(淸州派)라 하는데, 경흥도호부사 라사종은 여진족의 남침을 죽음으로 막아 병조판서(정2품국방장관)에 추증되고, 충정(忠貞)의 시호가 내렸다.
3파(派)의 후손으로 조선 명종때 장음정 라식은 문장기절이 높고, 정음(淨陰) 라숙(羅淑)은 홍문관 부제학(정3품)에 이르렀으며, 청백리로서 형제가 을사명현이었고, 인조때 구포(驅浦) 라만갑(羅萬甲)은 병자호란 명신으로 좌의정(정1품정승)에 추증됐으며, 숙종때 명촌(明村) 라양좌(羅良佐)는 도학이 깊은 의인이었다.
안정라씨는 청반(淸班)으로 알려져 왔다.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충효(忠孝)에 힘써 시조의 의로움을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왔다. 시조의 묘소는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동 해망산 계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