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지식을 습득하는 활동을 ‘학습’이라고 한다. 학습은 ‘배운다’는 의미의 ‘학(學)’과 ‘익힌다’는 의미의 ‘습(習)’을 조합해 만든 말이다.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면 누군가에게 배워야 하고, 그 배운 바를 스스로 익히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완전한 새로운 지식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양자 중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굳이 비중을 논하자면 개인적으로 ‘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은 환경에 따라 불공평할 수 있다. 국가 환경, 지역 환경, 또는 가정 환경 등에 따라 배울 기회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주위에 가르쳐줄 능력 있는 사람이 즐비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환경 속에 살아가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도 있다. 그러니 학은 불공평을 전제로 한다. 아무리 공평한 여건을 만들려 해도 이미 조성된 환경을 단숨에 뒤집을 수는 없다.

반면 ‘습’은 ‘학’에 비해 공평하다. 환경보다 중요한 것이 본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부는 ‘학’보다 ‘습’에 가치를 둔다. ‘습’은 배운 바를 익혀 완전히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과정이다. ‘학’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을 ‘습’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지식은 공고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웠어도, 스스로 익히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겉지식에 불과하다. 아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제 알지 못하는 단계에 머무는 것은 ‘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낀 바는 ‘학’에서 그칠 뿐 ‘습’의 단계로 스스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학교와 학원에서 수강하는 ‘학’의 과정만 되풀이하면서, 진정한 익힘 과정인 ‘습’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을 지켜본다. 스스로 익히며 깨닫는 바가 생길 때, 비로소 지식은 공고해진다. 배우기만 해서는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기 어렵다. 공자도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 하여 ‘학’과 ‘습’이 어우러져야 진정한 공부라고 했다.

요즘 아이들이 ‘습’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익히기를 방해하는 풍성한 놀 거리가 첫째 원인이다. TV, 컴퓨터, 핸드폰 등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재밋거리가 차고 넘치니, 그 유혹을 끊고 배운 바를 익히기에 돌입하기가 여간해 쉽지 않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 익힐 틈을 주지 않고 학원과 과외로 아이를 내모는 부모의 태도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습’을 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스스로 깨닫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기에 앞서 아이를 놀이와 차단하기 위해 학원과 괴외로 내몬다.

그 탓에 스스로 익히며 깨닫는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나아가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능력도 부족하다. 부모나 아이나 성적이 곧 공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정한 깨달음에 별 관심이 없다. 수치화돼 나타나는 점수와 순위에만 집착해 지식을 얻어나가는 학문의 길에는 관심이 없다.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 따위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수치로 나타나는 점수와 석차라고 생각한다.

공부의 기본 중 기본인 독서를 외면한 채 현란한 영상매체가 주는 즐거움에만 빠져 있으니, 아이들의 지식이 견고하지 못함은 당연하다. “요새 아이들은~”이라며 꼰대 사고방식으로 바라봐서만은 아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겪어보지 못하고, 걱정 없이 무엇이든 척척 해결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려움을 만나면 당차게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그냥 포기하거나 다음으로 미루려 한다. ‘학’만 하고 ‘습’을 게을리한 탓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은 오로지 부모와 사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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