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아들 학자로 키운 안정 라씨 부인

“가정교육의 산실 안정라씨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김씨를 탄생시킨 안정라씨 여인 아들 6형제 대제학, 영의정으로 길러내”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있는 안정라씨묘역에는 신도비가 2기가 있다. 라만갑과 그의 아들 라성두가 주인이며 라만갑 신도비는 1985년 6월 28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다.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해 종2품 이상을 지낸 사람의 묘 앞 70미터에서 100미터 사이에 세우는 비석으로 혼(魂)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안정라씨 묘역
비문은 라만갑의 조상과 그의 청년시절, 관직생활, 병자호란 당시 나라를 위해 힘썼던 일, 성실하고 효성스런 부인과 자손들에 대한 사실들을 적고 있다.

여기에서 안정라씨 가문의 성실하고 효성스런 부인과 자손들에 대한 행적, 그들의 방정한 품행과 명문가 뿌리의 가정교육 등을 알 수 있다.

명문(名門)이나 명가(名家)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가 하는 표양을 보고 자란다. 부모가 자신의 자리를 반듯하게 갖지 않고는 제아무리 훌륭한 가르침도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라만갑(羅萬甲)은 조선 중기의 (인조 20년)문신으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단신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모시고 공조참의(정3품), 병조참지(정3품)로서 관향사(管餉使)가 돼 군량 공급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아들 라성두(1614~1663)는 병자호란 때 아버지와 함께 안동에 피란해 서인 청서파의 영수인 김상헌(金尙憲)과 친교를 맺으며 공정한 정치와 권농으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고 송시열(宋時烈)의 천거로 해주목사(정3품수령)로 임명된 뒤 묵은 폐단을 척결하고 향약을 실시해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했고, 그의 돈독한 행실은 청렴한 명성을 얻었다.

여기서 김상헌과의 친교는 후일 두 가문이 사돈관계로 발전해 안정나씨와 안동김씨의 통혼을 통한 걸작품인 세상에서 말하는 후기 조선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 안동 김씨의 명성을 잉태한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과의 정면 대결을 외치며 굴욕적인 국서를 찢고, 청에 끌려가 옥고를 치르며 척화론자들에게 더없는 존경을 받으며 그의 문중 안동김씨는 대의명분 상징으로까지 추앙받으며 당대 최고 가문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강직해 관민들이 부정할 것을 아예 포기했다고 전한다. 한 왕족(王族)의 공자(公子)가 산정(山亭)을 짓는데 나라에서 금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가 김상헌이 대사헌(종2품)이 됐다는 말을 듣고 곧 기둥을 깎아서 모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두 가문의 연결고리인 라성두의 여식 안정 라씨(1630~1703)는 여섯 아들과 손자를 모두 훌륭한 학자로 길러낸 조선시대 최고 여성으로 받들어져야 할 어머니이자 교육자 상(像)이다.

부모에게는 효성이 지극하고 인자한 인품을 지녔고, 자식들에게는 의로써 훈계했으니 어릴 때부터 작은 잘못이라도 남편인 김수항이 모르도록 덮어 주지 않고 반드시 벌을 받게 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일이 있으면 엄하게 질책하며 모른 척하지 않도록 했다.

집안일에는 정성을 쏟고, 의(義)로써 훈계하며, 종복에게는 “매 때리는 일과 술이나 밥을 제대로 먹게 하는 일은 당연히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마음 씀씀이와 생활 자세를 중시하는 인간교육 중심의 명문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이었다.

평상시에자식들에게 기대했던 바는 탁월한 업적을 세워 비천한 데로 빠지는 것을 면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여러 손자들을 두루 사랑하면서도 뛰어난 재주에는 기뻐하고 우둔한 머리에는 애석하게 생각했다. 가장 미워하는 것은 게으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어서, 항상 이런 뜻으로 여러 며느리들을 힘쓰게 했다.

라씨는 영의정이었던 남편 김수항(김상헌의 손자)과 영욕을 함께 했던 내조자로도 훌륭했지만 안동 김씨의 ‘6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아들 6형제 즉,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예조판서, 대제학), 김창흡(金昌翕 : 대문장가), 김창업(金昌業 : 노가재연행록의 저자), 김창집(金昌輯 : 학자·문장가) 등 6창(六昌)이라는 여섯명의 문신과 대학자를 훌륭하게 성장시킨 공로 때문에 신사임당에 버금가도록 유명하다. 세상에서 말하는 안동 김씨(신안동 김씨)는 대체로 이들의 후손들이 얻어낸 명성이었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